“천정배는 ‘국민’이라는 말이 나올 때면 목울대가 불거지는 편이었고, 차병직은 ‘시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라치면 저음이 한껏 낮게 깔리는 축이었다.” 여덟 차례 있었던 대화 자리에서 사회를 맡은 서해성의 전언처럼, 두 사람은 법과 제도의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을 같이하다가도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로 들어오면 현실과 이상의 복잡 미묘한 경계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예를 들어 불구속 수사 원칙의 기본적인 사상이나 양형 기준의 형평성 문제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만 그것이 현대 정몽구 회장의 구속과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구속, 삼성의 소위 ‘엑스파일 사건’ 같은 구체적인 사안에 적용되면 생각의 갈림길이 드러나는 식이었다. 사법개혁과 인권문제도 두 사람에게는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사안임이 분명하나 그 해결 방식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발 딛고 선 자리에서 생겨난 두 시선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어느 하나 배제할 수 없는, 서로 조화를 이루어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 역시 분명했다. “실천적 삶으로서 정치와 시민운동을 잇는 대화를 세상과 공유코자 하는 둘의 자세는 목마른 참에 단물을 만난 격”이었다. 미래의 법률가들에게 쓰는 편지 법률가로 시작해서 정치와 시민운동의 길을 선택한 천정배와 차병직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대화를 젊은이들, 특히 법을 공부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의 금기와 일탈을 통해 조금씩 선악의 관념과 사회 규범을 인식하기 시작한 이야기부터, 법대생 시절, 사법고시 준비 과정, 그리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본격적인 법조인 생활을 시작하며 느낀 여러 가지 기억할 만한 경험과 느낌들을 선배 법학도로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대화'를 위한 독도법 : 지도책과 마법사 대화를 시작하며_ 천정배 : 여기가 로도스다 프롤로그 - 유년의 기억, 금기의 세계 일그러진 거울 - 생활과 규범 법 없이 살기, 법과 함께 살기 「도망자」와 두발 자유 오래된 회초리 - 형벌 제도 잔혹한 혹은 친절한 형벌의 역사 무엇을 위한 회초리인가 패자만 있는 승리, 사형제도 제도를 고칠 것인가, 세상을 고칠 것인가 - 사법개혁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아닌 형평성으로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는가' 누가 판결로 역사를 살해했나 -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 '처벌'은 '용서'에 대립하지 않는다 참여정부의 과거 청산 내 수염은 죄가 없다 - 인권 살아 있는 인권을 만나다 권리와 효율성의 복잡한 경계 침해와 보호 사이, 문턱에 선 과학 기술 시민이 쓴 정치 일지 - NGO와 정치 NGO와의 인연 한국의 NGO, 정치를 말한다 '시민적 정당성'에 근거한 시민운동 법창한담 - 이런 법 저런 생각 법 언어의 문제점을 짚다 "불의의 하수인이 되느니 차라리 법을 어겨라" 한미 FTA와 법률시장 개방 아프락사스의 술잔 - 법과대학 후배들에게 법률가의 초상, 어제와 오늘 전문적 지식과 보편적 지식을 갖춘 법조인 사법고시와 로스쿨 제도 법률가의 사회적 역할 에필로그 - 너와 나의 내일 대화를 마치며_ 차병직 : 여기서 춤추어라 '대화' 일지

장난이 지나쳐 정말 고의적인 범죄행위나 다름없는 일을 저지른 적도 있습니다. (……) 주인아저씨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우리가 한 짓이 얼마나 위험하고 큰 잘못인지 설명했어요. 그리고 크게 처벌받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어요. 그러더니, 다음부터 그런 일을 절대 하지 않겠다면 모래터에서 계속 놀아도 좋다고 하면서 돌아갔어요. 우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주인아저씨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짧게 잘못을 빌었어요.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강렬합니다. 비로소 우리의 행동을 진지하게 반성해볼 계기가 되었거든요. 잘못된 행동을 인식하고 자성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데는 응징보다는 관용이 효과적이라는 기억이 지배적입니다.(차병직, ‘프롤로그_유년의 기억, 금기의 세계’ 35~36쪽) 수석 입학까지 하다보니 서울대 법과대학 재학 초기에는 상당히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한동안 손을 뻗기만 하면 모든 걸 다 얻을 수 있을 듯 의기양양했지요. 그리고 법과대학에선 나름대로 탐구적인 학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불만은 크게 두 가지였어요. 첫째는, 법학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버린 겁니다. 애당초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법률은 고리타분하고 적성에 맞지 않다고 느꼈지요. 그리고 사회에 대한 기여도도 낮고 기여 방법도 마땅치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고시 제도처럼 공부만으로 무언가를 해결한다는 게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둘째는 당시 정치 상황과 관련된 불만이었습니다. 1학년 때 유신이 선포됐지요. 그 상황에서 헌법이니 헌법학이 도대체 무슨 소용 있으며 법률이 어떤 가치를 지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런데 또 생각만 그랬지 행동으로 나서지는 못했어요. 학생운동에 나선 친구들에 대해선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경의를 표시했습니다. 일종의 동반적 지지자였지요.(천정배, ‘아프락사스의 술잔_법과대학 후배들에게’ 276쪽) 사법연수원 다닐 때도 모의 사건 기록을 읽고 판결문을 작성하는 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정해진 양식과 문틀에 따라 하루 종일 낑낑대며 만들어 제출하면, 며칠 뒤 담당 교수가 붉은 펜으로 일일이 첨삭해서 돌려주었죠. 그런데 그게 지겨웠는지, 어느 날 전 과감하게 파격을 시도했습니다. 민사 판결문이었는데, 일반적인 형식을 버리고 모든 문장을 아주 짧게 잘라서 썼지요. 당시 지도교수는 정년퇴임하신 윤재식 전 대법관이셨죠. 결과가 기대됐는데, 다음 시간에 제가 쓴 판결문을 받아보니 내용에 관한 지적만 있더라고요. 문장에 대해서는 당시로서는 대책이 없었던지 일언반구 평가가 없었습니다. 야심찬 저의 반항적 시도는 흐지부지되고 말았지요.(차병직, ‘법창한담_이런 법 저런 생각’ 250쪽) 그때 입학식사의 내용이 머릿속에 쏙 들어왔어요. 제목이 ‘여기에서 춤추어라’였습니다. “여기 자유 정의 진리의 전당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민족주체 민간주체의 석탑의 광장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지성과 야성, 한국과 세계의 캠퍼스가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그 웅변은 3월의 날씨만큼이나 명징했고, 경험이 부족하던 시절의 저는 그 말을 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그 식사는 헤겔의 ??법철학?? 서설에 나오는 구절을 패러디한 것이었습니다. 헤겔은 이렇게 썼지요.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여기 장미꽃이 피어 있다. 여기에서 춤추어라.” 환상의 나라, 허구의 나라, 불가능의 나라에 닿기 위해 헛되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선 바로 여기, 지상에 확실히 존재하는 현실의 땅에서, 비록 불만족스럽더라도 최선의 성과를 이루도록 노력하라는 격려였지요.(차병직, ‘아프락사스의 술잔_법과대학 후배들에게’ 277~2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