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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객잔(큰글자책) : 김명리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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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사회학일반
저자 강준만
출판사/발행일 소명출판 / 2024.04.19
페이지 수 354 page
ISBN 9791159059001
상품코드 35691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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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내용
‘조국 수호’ 전위대와 친민주당 방송이 된 MBC 2019년 9월 30일 MBC 보도국장 박성제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서울 서초동 촛불집회 인원을 “딱 보니 100만 명”이라고 발언했다. 어느 방송사의 보도국장이 그런 정치적 발언을 다른 방송사에 나가 공개적으로 한 적이 있었던가? 그는 “검찰이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며 검찰을 비판하기도 했다. 어떻게 공영방송이 ‘조국 수호’의 선동 전위대 노릇을 할 수 있는가? 2020년 2월 24일 MBC 사장에 취임한 박성제는 “우리는 조국 국면에서 검찰 주장은 재판에서 깨질 수 있기 때문에 일방적 검찰 받아쓰기는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국민들에게 선입견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그런 보도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신뢰도가 상승한 것이다”고 말했다. 박성제가 말한 신뢰도는 ‘특정 정치 팬덤’의 신뢰도였을 것이다. MBC의 불공정과 편파성은 문재인 정권 내내, 아니 문재인 정권 이후 지속된다. ‘조국 사수’ 집회에는 헬기까지 띄우고 50미터 높이의 카메라용 크레인까지 세워 톱뉴스로 다루지만, 광화문 조국 반대 집회는 아홉 번째 뉴스로 보도하면서 “쿠데타 선동”이라고 한 여당인 민주당 지도부의 목소리도 함께 보도했다. 2020년 4ㆍ15 총선을 불과 보름 앞둔 3월 31일 MBC 〈뉴스데스크〉는 이상한 ‘단독’ 보도를 했다. 이른바 ‘검언유착’ 의혹을 제기한 보도였다. 그러나 2023년 1월 25일 일명 ‘채널A 사건’으로 기소된 이동재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MBC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반성할 뜻도 전혀 없었다. 이처럼 MBC는 부정확한 기사와 의도적 이슈몰이 보도로 문재인 정권을 위해 도움이 될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광기(狂氣)를 보여주었다. MBC의 ‘어용 방송’은 날이 갈수록 그 농도를 더해갔다. MBC 〈스트레이트〉는 2018년 2월부터 2020년 9월까지(총 158편) 국민의힘 비판 보도는 80건인데 비해 민주당 관련 보도는 단 3건뿐이었다. 또 2020년 7월 26일, 8월 2일, 9월 6일 3차례에 걸쳐 집값 폭등의 원인을 박근혜 정권 탓으로 몰고 가는 듯한 과도한 정파성의 폐해를 여실히 보여준 방송을 했다. MBC의 상식을 초월한 일탈은 멈출 줄을 몰랐다. MBC 취재기자 필기시험의 논술 부문 논제인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문제 제기자를 피해자라고 칭해야 하는가, 피해 호소자라고 칭해야 하는가?”를 출제해서 2차 가해 논란을 일으켰다. 2022년 1월 16일 MBC 〈스트레이트〉가 ‘김건희 통화 녹음 파일’을 방송하자, 시청률 17.2퍼센트를 올리며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는 유튜브에 압도당하는 지상파 방송의 몰락을 시사한 상징적 사건이 될 만했다. 이게 MBC가 생각하는 방송 민주화인가? MBC가 천명한 “사회 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불편부당한 공정 방송에 힘쓰는” 원칙과 정신에 충실한 것이 방송 민주화다. 이후에도 윤석열 흠집 내기와 김건희 때리기는 지속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2022년 9월 21일 미국 뉴욕에서 벌어졌다. 윤석열의 “이 XX들이…쪽팔려서” 발언 사건은 한동안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MBC는 윤석열이 ‘언제 또 사고 치나’라고 궁금해하면서 ‘가차 저널리즘(gotcha journalism)’을 구현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 것은 아니었을까? MBC는 왜 비정규직들에게 잔혹하게 보복했는가? MBC 언론노조는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 5일 후인 2016년 12월 14일부터 2017년 6월 15일까지 총 3차에 걸쳐 101명을 ‘언론 부역자’로 선정해 이들을 쫓아내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MBC 언론노조는 이들을 ‘언론 적폐’라는 낙인을 찍으며 적폐 청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후 대규모 인사 발령이 났다. 보도국장, 편집부장, 청와대 출입 기자는 중계차 PD가 되었고, 뉴스부장은 경영직 업무를 맡고, 보도국 직원은 기술연구소로 보내졌다. 해외에 있던 특파원들도 귀국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보도국 국·부장단 전원이 보직 해임되었고, 파업에 동참하지 않았던 약 80명의 기자는 뉴스 마이크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MBC는 권력에 저항해 싸우지 않은 동료 방송인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보는 듯했다. 이렇게 파업에 불참한 대가는 혹독했다. 2019년 7월 16일 서울지방노동청 본청 앞에 MBC 계약직 아나운서 7명이 모였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시행 첫날을 맞아 진정을 제출하려고 집결한 것이었다. 이들은 2016~2017년에 입사했다가 새 경영진이 들어선 이후 계약 해지되었고, 법적 공방 끝에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판정을, 법원에서 근로자 지위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출근했지만, MBC는 사실상 ‘직장 내 괴롭힘’으로 대응했다. 이들에게는 맡겨진 일이 없었고, 이들은 9층 아나운서실이 아닌 12층 콘텐츠 부서 옆 비좁은 공간으로 출근했다. 이들은 이곳을 골방, 격리소, 징벌방 따위로 불렀다. 힘없는 ‘을’들을 향해 이렇게까지 상처를 줄 필요가 있었을까? 이는 MBC의 순혈주의와 매우 강한 ‘구조적 편향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친(親)노조 방송인들에게 가해졌던 보복이 이제는 반(反)·비(非)노조 방송인들을 향해 가해지는 비극이 재현된 것이다. 강압과 차별이 더욱 집요했던 경력 기자들에게는 “너희가 MBC에 있어야 할 이유를 대라”는 모욕과 “조사 결과에 따라 채용이 무효가 될 수 있다”는 겁박이 매일 반복되었다고 한다. 이제 MBC는 공영방송이 아니라 노영(勞營) 방송, 즉 노조가 지배하는 공영방송이 되었다. 노조는 선과 정의를 대변하는가? 진보 진영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노영 방송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노조가 특정 정권을 지지하면 노영 방송은 사실상 어용 방송이면서도 그것을 위장함으로써 저항 자체를 어렵게 만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용마가 원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2016년 12월 16일, 문재인 대선 후보는 방송 민주화를 위해 고초를 겪다가 암 투병을 하면서도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애쓰던 MBC 기자 이용마를 찾아갔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곧 공영방송의 독립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다. 이용마는 2019년 2월 13일 페이스북에 “공영방송 사장 선임 과정에 공론화위원회 방식의 국민 대표단 제도를 전격 도입해 국민들이 직접 사장을 뽑을 수 있게 하면 공영방송 종사자들이 정치권 눈치를 볼 일이 없어질 것이다”고 썼다. 이용마는 그해 8월 21일 세상을 떠났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용마의 집을 두 번이나 방문(2019년 2월 17일)했던 문재인은 이용마의 외침에 적극적 찬성을 표했지만, 문재인 정부 내내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재인은 “법안이 통과되면 온건한 인사가 선임되겠지만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며 법 개정을 무산시키고 말았다. 최근 민주당이 방송법 개정안을 추진하면서 언론노조, 방송계, 일부 관련 학계 등의 지지를 받아 그것을 거부하는 국민의힘을 무슨 반동 세력이나 되는 것처럼 몰아붙이고 있다. 국민의힘이 아무리 나쁘고 어리석고 우둔하다고 해도 민주당이 개혁을 빙자해 저지르는 적반하장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 압도적 다수 의석으로 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여당 시절에는 무엇을 하고 이제 와서 방송법을 개정한다고 하는가? 그러니 민주당의 방송법 개정안이 중립적이거나 공정할 수 없는 것이다. 민주당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송법 개정안을 들고 나와 권력의 방송 장악에 결사반대하는 공정성의 화신처럼 구는 것은 민망할 정도다. 다시 말해 민주당은 집권 후 5년 동안 공영방송을 장악해놓고서 지난 대선에서 패배하자 엉뚱한 방송법 개정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런 후안무치가 어디 있는가?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도 과거 민주화의 역사를 소환하는 것은 여야 정당을 대하는 중립적 자세라고 보기는 어렵다. 과거의 역사로 인해 형성된 방송인들의 ‘아비투스(습속)’가 어떤 정당에 더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어쩔 것인가? 문재인 정권 출범 때 방송사 경영진을 바꿀 수 있는 KBS 이사회와 방송문화진흥원 이사진 교체를 위해 온갖 무리수를 저지르면서 앞장선 것은 언론노조와 시민단체였다. 언론노조는 방송법 개정안을 문재인 정권 내에 성사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언론노조는 이전의 ‘공영방송 장악 금지법’, 즉 여당이 이사회를 독식하거나 야당이 반대하는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하지 못하게 하자는 취지로 여야 합의를 한 것에 대한 민주당의 배신에 분노하기는 했는가? 언론노조는 왜 문재인 정권하의 공영방송 평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가? 또 ‘문재인 정권의 방송 장악은 있었는가’라는 질문에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윤석열 정권을 향해 외치는 ‘방송 장악’ 운운하는 상투적인 구호로는 합리적 소통이 불가능해진다.
목차
머리글 / 청렬淸冽과 낙조落照 제1부 / 달 속 계수나무 꺾으러 가세 적소謫所 | 뽕나무 한 그루 | 설해목雪害木 앞에서 | 종鐘 이야기 | 사샤의 집에는 봄이 왔을까? | 우리들의 봄 | 절기節氣의 힘 | 동백 꽃분에 되 핀 사랑 | 가파름이여, 돌아보지 말라 | 산골 민박집 방에 엎드려 | 기로전설棄老傳說 이야기 | 달 속 계수나무 꺾으러 가세 | 히말라야 등신불 | 북인도의 달 | 앰뷸런스 로마 제2부 / 쉿, 임종중입니다 울 엄마 오셨네! | 오는 벚꽃대선 무렵엔 | 사전투표 | 엄마의 생애 마지막 주권행사 | 서명하다 | 저 가을빛 | 쉿, 임종중입니다 | 하루 | 천변풍경 | 몽, 너마저 | 닥쳐올 이별 | 안녕, 몽 | 오늘도 무사히 |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 곳 | 엄마를 떠나보내며 | 꽃밭의 시학 | 생일상 | 엄마 곁에 누울 때면 | 월색月色만 고요해 | 늦은 성묘 | 봐, 물 위의 새들을! 제3부 / 쇠망치를 삼켰으니 바늘을 꺼내야 한다 암보다 문학이 더 고통스러웠다 | 쇠망치를 삼켰으니 바늘을 | 꺼내야 한다 | 옛 수첩을 태우며 | 그림에 관한 짧은 노트 | 유머러스한 슬픔 속의 풍자 | 하품을 하면서 세계를 | 집어삼킨다? | 소리의 현絃 | 항주杭州, 그 물빛 기억들 | 흩날리는 시간의 뒤뜰에 | 도적의 발걸음 | 모과, 모과꽃 | 시무나무와 김삿갓의 시 131 | 장맛비 잦아들기 무섭게 | 시마詩魔 | 경자년庚子年을 보내며 제4부 / 곧 가을이 오리라 저 단풍 빛 | 가을 마당에 앉다 | 가을 대방출 | 처진 소나무 | 늦가을 묘적사에서 | 곧 가을이 오리라 | 능내 | 가을 수종사 | 파위교에서 | 사람의 저녁 | 나날들 | 빈자일등貧者一燈의 달 | 자연사 할 뻔! | 날짜들 제5부 / 도스토예프스키의 홍차 도스토예프스키의 홍차 | 셜리에 관한 모든 것 | 무한으로 빚어낸 생명의 | 경이驚異 | 시인과 군인 | 못 생긴 사람은 얼굴만 봐도 흥겹다 | 비밀을 말하려는 순간 | 임을 위한 행진곡 | 청계천 복원에 대한 한 생각 | 시인은 이 땅의 우물물이 | 의심스럽다 | 누구나 기억처럼 왔다가 가지 | 샤머니즘을 돌아보며 제6부 / 개와 사람, 비의 저 백골들 하늬바람 사흘 |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밤 | 사랑이라는 의무 | 노래의 중성화시술 | 고양이 겨울나기 준비 | 산골집 새해 선물 | 비행 오류 참사 | 바보의 봄, 미친 봄을 | 애도하는 노래 | 풍요로워라, 이 추석 | 마리가 왔어요! | 나의 아름다운 고양이 | 오드아이 | 초롱이 생각 | 아아 개소주 | 어찌해야 하나 | 개와 사람, 비의 저 백골들 제7부 / 책으로 세운 청춘의 기념비 문학을 통해 | 책상을 줄 수야 없으니까 | 봄의 기미 | 책으로 세운 청춘의 기념비 | 밤 인사 | 검은 눈물의 의미 | 故 金明梨之墓 | 미라언니의 꽃밭 | 반얀나무 한 잎 | 한 권의 책이 | 개미와 나비와 분꽃송이들을 제8부 / 아름답고 강하고 빛나는 것들 앙큼한 봄 | 진주목걸이 | 해빙기의 저녁 | 지금! | 내 마음의 적폐쯤이야 | 애련설愛蓮說 | 아름답고 강하고 | 빛나는 것들 | 이월 블루스 | 인산후人散後 | 가평, 조르바, 일몰시각 | 슬픔의 맛 제9부 / 네팔에 오면 네팔리가 되어라! 네팔 대지진 | 네팔에 오면 네팔리가 되어라! | 카트만두 이야기 | 스와얌부나트 | 죽음의 축제 가이 | 자뜨라Gai jatra | 페와 호변의 오후 | 아아, 히말라야! | 마차푸차레 | 반디푸르 | 빈디야바시니 사원의 결혼식 | 물장구치는 마음 | 포카라의 반딧불이 준Jun | 담푸스 | 포카라 일주 | 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매 | 타멜에 내리는 비 | 킹스 로드 | 파탄 더르바르 | 쿠마리 | 바그룽의 소년 | 고통 | 죽음을 기다리는 집 | 모한 | 보우더나트 | 시낭독회와 아그리띠의 | 송별식 | 네팔 박테리아에 감염되다 | 바부스님 | 수나코티의 비 | 박타푸르 | 마야의 집 | 창구 나라연 사원 | 미소 | 소의 잔등에 올라앉은 새 그토록 오래 날아가지 않았으니
본문중에서
울 엄마 오셨네! 어버이날 저녁 대문간의 불두화 활짝 피어난 때에 엄마가 돌아오셨다. 산골집 적막해서 못 살겠다며 서울 사는 동생네 다니러 가셔서는 거기 눌러앉으신 지 얼마 만인가. 그 사이 지병은 더 깊어져서 지팡이 짚고 부축해 드려도 기우뚱 진동걸음. 여기가 어디냐고 자꾸만 물어보시는 여든넷, 살아온 기억의 거개가 유실되었지만 꽃과 나무와 새와 구름, 해와 달과 바람의 기억만은 유현(幽顯)해서 불두화 꽃그늘에 기대앉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시기도 한다. 그러니 “노인들이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은 생의 승리”라는 마르케스의 말은 옳다. 여덟 해째 진행성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지만 아직은 당신의 자식들, 손주들 또렷이 알아보시고 사계(四季)의 저마다 다른 바람소리, 봄 나비 떼 같은 심금心琴의 기억들만은 금강석만큼이나 단단해 보인다. 맞다, 자기 보물을 어디에 숨겼는지 잊어버리는 노인은 없다. 놀라워라, 치매에 드신 우리 엄마, 즐겨 부르시던 노랫말만큼은 한 소절도 잊지 않으셨구나! 꽃밭의 시학 아침놀이 번지는 꽃밭 봄 마당의 꽃들 중에는 분통을 터뜨리듯이 피는 꽃 참았던 울음을 끝내 터뜨리듯이 피는 꽃도 있다 꽃샘바람 잎샘바람 이제는 다 물러난 것 같은 오월 해당화 붉은 꽃등 곁에 팔순의 어머니 주름진 눈가에 가물가물 분홍 물살 이는데 울지 말아라 아프지 말아라 오래오래 허공을 쓸어내리다가 잠잠히 어둠을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피는 꽃도 있다 시마(詩魔) 시마(詩魔)에 들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첫 시집 『물 속의 아틀라스』(1988년)를 내던 무렵의 몇 달 동안과 세 번째 시집 『적멸의 즐거움』(1999년)을 출간하기 전의 한두 계절 동안을 누군가가 불러주는 듯이, 마치 안에서 뿜어져 나오듯이 하루에도 예닐곱 편 이상의 시를 내리닫이로 썼었던 것 같다. 출판사에 시집 원고를 넘기고 공판인쇄에 들어간 중에도 수십 편의 시를 교체하는 극성을 떨기도 했으니, 이제 와 돌아보면 썩 변변치도 않은 시들을 두고 시마니 뭐니 입설에 올린 일이 스스로 부끄럽기만 하다. 하기사 시마도 늙어 사람의 집 문간에 걸터앉아 숨 고르기만을 하고 있는지 요사이는 그때의 신열 오르던 순간들, 한 구절, 한 구절 받아 적기에도 벅찼던 순간들이 매오로시 그립기만 한 것을. 곧 가을이 오리라 양광(陽光)은 등에 따갑고 그늘 쪽은 어느새 스산하다. 햇빛과 그늘의 스미고 흩어지는 경계,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좀 더 오래 머뭇거려도 좋을 시기가 이즈음인 듯하다. 여름내 재재발랐던 빛의 걸음걸이가 슬슬 굼떠지기 시작하고 큼큼거리면 코끝에 바짝 당겨올 햇빛, 그늘, 가을꽃 향기. 해묵은 노트를 열고 「오늘 밤에 만난 가을」을 다시 읽는다. 다자이 오사무는 일찍이 가을을 두고 “여름이 타고 남은 것”,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燈籠), 그리고 코스모스 무참”이라고 썼다. 심은 적 없는 마당가 쑥부쟁이 보랏빛 꽃들 아래 한 마리 새의 주검…… 적막한 천지간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실려 왔나, 꽃들아, 새야, 문상 온 나비야. 담푸스 해발 1,650m 담푸스Dampus에 올랐다. 날씨 흐린 탓에 마차푸차레며 안나푸르나 1봉(峰)의 선명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깎아지른 바위 벼랑에 초막(草幕)을 짓고 사는 이들의 풀잎 닮은 웃음, 굵게 팬 주름고랑마다 햇빛이 물살처럼 반짝이며 흘러가는 것을 본다. 도시가 세워지고 교역이 오가고 문명이 꽃피고 큰 바람에 업혀온 작은 바람이 눈앞에 가득한가 했더니 멀리 아득히 어느새 흩어지고 없다. 산이 그곳에 있으니 시절 인연을 옮겨 다니며 사람이, 바위가, 초목이, 하늬바람이 거기에 포자처럼 깃들여 살았으리라.

저자
강준만
정치평론가이자, 사회학자, 언론인자, 대학교수이다.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와 위스콘신대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한 후 현재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왕성한 집필활동으로 한겨레를 비롯한 각종 신문, 잡지, 언론매체에 시사평론을 기고하고 있으며 인문 · 사회 · 정치 · 문화에 관한 다양한 책을 출간했다. 평생의 작업으로 '한국 생활사'를 꿈꾸고 있으며, 지금까지 축구, 전화, 바캉스, 도박, 선물, 성형, 목욕, 입시 등 40여 가지 주제에 대해 써온 글을 계속해서 단행본으로 엮어낼 계획을 가지고 있다.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 2013년에 ‘증오 상업주의’와 ‘갑과 을의 나라’, 2014년에 ‘싸가지 없는 진보’, 2015년에 ‘청년 정치론’, 2016년에 ‘정치를 종교로 만든 진보주의자’와 ‘권력 중독’, 2017년에 ‘손석희 저널리즘’와 ‘약탈 정치’, 2018년에 ‘평온의 기술’과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2019년에 ‘바벨탑 공화국’과 ‘강남 좌파’, 2020년에 ‘싸가지 없는 정치’와 ‘부동산 약탈 국가’, 2021년에 ‘부족주의’ 등 대한민국의 민낯을 비판하면서 한국 사회의 이슈를 예리한 시각으로 분석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좀비 정치』,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 『부족국가 대한민국』,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남 좌파 2』, 『바벨탑 공화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평온의 기술』, 『약탈 정치』(공저),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힐러리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3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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