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구매홈 >
역사와 문화
>
한국사
>
조선시대

펼쳐보기
노비와 쇠고기 : 성균관과 반촌의 조선사
정가 39,000원
판매가 35,100원 (10% , 3,900원)
I-포인트 1,950P 적립(6%)
판매상태 판매중
분류 조선시대
저자 강명관
출판사/발행일 푸른역사 / 2023.02.28
페이지 수 704 page
ISBN 9791156122449
상품코드 356675785
가용재고 재고부족으로 출판사 발주 예정입니다.
 
주문수량 :
대량구매 전문 인터파크 대량주문 시스템을 이용하시면 견적에서부터 행정서류까지 편리하게 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도서를 견적함에 담으시고 실시간 견적을 받으시면 기다리실 필요없이 할인받으실 수 있는 가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매주 발송해 드리는 인터파크의 신간안내 정보를 받아보시면 상품의 선정을 더욱 편리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대량구매홈  > 역사와 문화  > 한국사  > 조선시대

 
책내용
눈이 번쩍 뜨일 뜻밖의 사실 조선은 내내 소의 도축을 금하고, 쇠고기를 먹은 사람까지 처벌했다. 원칙적으로 그랬다. 하지만 17세기에 서울에는 속전을 물고 쇠고기를 파는 ‘현방’이 공공연히 존재했다. 책은 현방을 운영하던 반인泮人과 이들이 살던 반촌 이야기를 촘촘히 풀어간다. 성균관 주변의 ‘반촌’에 살던 그들이 고려 시대 성리학을 처음 전한 안향이 기증한 노비에 뿌리를 두었다든가, ‘제업문회’란 일종의 학교를 자체적으로 운영하기도 했다는 등 여느 역사책에서는 만나기 힘든 사실을 소개한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반인들이 자비로 무장을 갖추고 참전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반인들은 1년에 여섯 달을 입역하고, 7~8세부터 입역하는가 하면 성균관 유생들에게 회초리를 맞아가며 봉사했다는 수탈상도 그려진다. 노예들이 기록을 남겼을 리 없으니 다양한 사료를 꼼꼼히 뒤져낸 공력이 감탄스럽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 음식문화 중심에 쇠고기가 있었으니 불교국가인 고려에서도 개성 시전에서 고기를 팔았다든가, 18세기 조선에선 해마다 약 20만 마리의 소가 도축되는 ‘쇠고기 국가’였다는 사실 등도 만날 수 있다. 무릎을 칠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 반인들이 수탈의 대상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단다. 성균관과 일종의 경제공동체가 되어 삼법사의 수탈에 반발하기도 했고, 유생들이나 과거를 치러온 이들이 묵는 여각의 주인은 ‘반주인’이라 하여 과거 합격 잔치를 반주인 집에서 치르는 등 내내 이익을 공유했다. 과도한 ‘세금’을 피해 생계를 도모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도 등장한다. 반인들이 얼음 판매업을 독점하려 ‘빙계’를 만든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조선 후기에 육류·어류의 소비가 늘어나면서, 여름철에 육류·어류의 부패를 막기 위해 국가는 물론이고 의열궁義烈宮이나 성균관에서도 얼음이 부족하면 사빙을 사서 썼다. 반인은 1768년 빙계氷契를 조직하여 사빙私氷을 독점하고자 했다. 빙계가 창설되기 전에 경강변에는 사빙업자가 30~40곳 있었기에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1789년 궁방의 마직들의 횡포에 맞서 사흘 동안 현방 문을 닫아 서울 시민들 제사상에 돼지고기를 올리도록 한 ‘철도’, 반인들이 성균관 식당에 식사 제공 노역을 거부한 ‘궐공’, 이로 인해 유생들이 성균관에서 물러나는 ‘공재’ 등 그 자체로 한 편의 소설이 될 만한 이야기들이 곳곳에 실렸다. 번득이는 예리한 비판의식 현방, 즉 조선의 공식적 쇠고기 판매는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농사도 장사도 할 수 없는 성균관 공노비들의 생계수단을 위해 허용한 현방은 점차 형조, 사헌부, 한성부 삼법사의 먹잇감이 되었다. 이들의 실무관리인 하예에게는 따로 급여가 없었으니 이를 마련하기 위해 불법행위 단속을 빌미로 가혹한 속전을 물렸다. 차인들이 구하기 어려운 소의 특정 부위를 구입하겠다고 나선 뒤 이에 응하지 못한 현방에게 돈을 받아내는 ‘방전’이 그런 예다. 종내에는 성균관까지 ‘현방 등 치기’에 가담했으니 조선 후기 성균관은 현방에서 수탈하는 돈으로 운영되었다. 이를 두고 지은이는 “사족 체제의 정점에 있던 자들은 성균관을 존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실제 재정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고도 근원적인 대책은 관심 밖이었다고”고 비판한다. 정조는 각 군문의 군졸들이 밤에 현방을 찾아와 돈을 요구하는 일을 막기 위해 ‘고입인가율’을 적용하도록 하는 ‘게판’을 허용했는데 이 역시 흐지부지되는 등 논의만 무성했지 효과적인 대책은 서로 미루기만 할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반인과 현방의 입장에서는 삼법사와 성균관으로부터 이중의 수탈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 사족체제의 최고 교육기관과 경찰기구가 반인과 현방의 수탈 위에 존립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갈파한 대목은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책은 역사서로는 이례적으로 각종 수치 자료까지 인용했기에 읽기 만만치 않다. 하지만 쇠고기를 중심으로 조선사를 관통하면서 곳곳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 덕분에 조선 정치 비판서로도, 풍속사로도 공들여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목차
머리말 01 쇠고기 1. 삼한에서 고려까지 ● 삼한과 삼국시대 ● 고려 원 간섭기 이후 2. 조선 전기 ● 금도령과 ‘달단 화척’ ● 불법 도축과 쇠고기 소비의 증가 3. 조선 후기 ● 서울의 사도 ● 지방 사도 ● 관포 국가가 설치한 공식 관포|국가가 묵인한 지방의 관포 ● 법의 무력화 02 반인 1. 반촌 2. 반인 ● 반인의 유래 ● 반인의 수 ● 반인의 노역 3. 반주인 4. 반인의 성격과 문화 ● 반인의 언어와 폭력적 성향 ● 반인의 지식과 한시 문학 및 예술 03 성균관과 삼법사 1. 성균관 ● 조선 전기 성균관의 재정 ● 임병양란 이후 재정의 붕괴 임병양란 이후 재정 상황|성균관의 재정 수요|성균관의 토지|성균관의 절수 어장|노비신공 2. 삼법사 ● 삼법사와 속전 ● 이예와 금란 04 현방 1. 반인과 도축업 ● 반인의 생계수단 ● 반인과 소의 도축 2. 현방 ● 현방의 출현 시기 ● 현방의 수와 위치 ● 현방의 구성과 구성원 ● 소의 도축 방법과 부산물 05 수탈 1. 속목ㆍ속전과 1707년의 감축 2. 사헌부 속전의 복구와 성균관의 현방 수탈 3. 1712년 현방의 빚과 공금 대출의 시작 4. 삼법사의 본격적 수탈의 전개 ● 1724년 삼법사 속전 감면 요청의 실패와 공금의 대출 ● 1728년 조지빈의 상소, 궁핍해지는 반인과 성균관 ● 삼법사 속전 감축 요구와 반복된 실패 대사성 정우량ㆍ김상규ㆍ김약로ㆍ서종옥의 요청과 좌절|1740년 대사성 심성희의 해결책 제안|왕과 조정의 무능과 책임 회피 ● 1750년 균역청 설치 이후의 사정 ● 1812년 궐공과 대책의 실패 5. 새로운 수탈의 주체, 궁방 6. 명문화된 대책, 〈현방구폐절목〉 ● 1857년 〈현방구폐절목〉 ● 1862년 〈현방구폐절목〉 06 대응 1. 현방의 확장과 첩도 ● 현방의 확장 ● 첩도 2. 건전과 창전, 우방전 ● 건전 ● 창전 ● 우방전 3. 어물전과 염해전 등 ● 어물전 ● 침어전 ● 염해전 ● 빙계 07 저항 1. 식당 도고 2. 게판 3. 집단행동, 철도 4. 궐공 08 해방 1. 제도의 변화 ● 1895년 〈포사규칙〉 〈포사규칙〉의 내용|〈포사규칙〉과 현방|현방의 포사세|포사와 포사세의 관할권을 둘러싼 논란 ● 1905년 〈도수규칙〉 ● 1909년 〈도수규칙〉 2. 갑오개혁 이후 반인의 활동 ● 회사 설립을 위한 시도 ● 검포소 ● 균흥조합소 3. 숭의학교 설립 09 끝맺음 주 찾아보기
본문중에서
969년(광종 19)에 광종은 궁중에서의 도살을 금하고 육선肉膳, 곧 고기 요리의 재료를 ‘시전市廛에서 사서 올리게 했다’고 한다. …… 개성 시민을 위해 개경에 개설된 시전에서 고기가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설 시장에서 팔릴 정도라면, 고기에 대한 일정 규모 이상의 수요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17쪽). 1362년 금살도감의 설치 이래 소의 도축을 금지했던 법령들은 15세기 후반이면 사실상 사문화되고 있었다. 이후 도축자를 체포하여 처벌하는 한편 체포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논상論賞하는 절목을 마련하기도 하고, 거골장이 4범할 경우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처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36쪽). 법은 소의 도축과 쇠고기의 판매와 식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준행된 적은 없었다. 지배계급부터 쇠고기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법은 고기를 먹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없애지 않는 한 적용될 수 없었다(39쪽). 현방은 소의 도축이 불법인 것을 전제로 벌금, 곧 속전贖錢을 형조·사헌부·한성부에 내고 공식적으로 도축과 판매를 허가받은 점포였다. 속전은 일종의 영업세인 셈이다. 현방의 영업 공간은 서울로 한정되었다. 현방의 경영자인 반인은 뒤에 지방에서도 일부 도축과 판매의 권리를 갖게 되지만, 그것은 국가가 일부 지방에 도축과 판매를 묵인하면서부터 가능해진 것이었다(43쪽). ‘장패藏牌’는 사도를 단속하는 담당관서인 형조·사헌부·한성부에서 금리들이 단속을 나갈 때 주는 금패를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일정한 기간 동안 소의 도축을 공식적으로 허가한다는 뜻이다. …… 1690년경에 새해 첫날을 전후한 3일 동안(곧 5일 동안으로 바뀜) 삼법사에서는 소의 도축에 대한 단속을 멈추었으니, 약 10일 동안 소의 도축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51쪽). 서울과 지방을 가릴 것 없이 소 값이 지극히 싼 것을 이롭게 여겨 곳곳에서 도축이 낭자하고(1762), 큰 도회나 작은 취락을 막론하고 장시가 있으면, 감영의 허가증을 갖고 있는 포사가 반드시 있었으니, 쇠고기를 길거리에 채소처럼 걸어놓고 파는 ‘쇠고기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66쪽).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饋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과 한양의 5부五部 안의 24개 푸줏간, 그리고 300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쇠고기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 ……”라고 말했다. 1년의 총 도살 수는 18만 2,500마리이다. …… 당시 인구를 2천만 명으로 본다면, 100인당 1마리(박제가의 통계) 혹은 50인당 1마리(이한운의 통계)에 가까우니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조선은 박제가의 말처럼 작고 가난한 나라였으나, 쇠고기만큼은 적지 않게 공급되고 있었던 셈이다(68쪽). 성균관 주변에 거주하면서 성균관에 직접 신체노동을 제공하는 노비와 지방 여러 곳에 흩어져 살며 신공身貢을 바치는 외거노비가 그것이다. 전자를 특별히 ‘반인泮人’이라 부른다. …… 반인은 ‘반촌泮村 거주인’이란 뜻이다. …… 반촌은 ‘반궁泮宮’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 서주西周 시대에 천자가 설치한 대학은 벽옹?雍, 제후諸侯가 설치한 대학은 반궁이라 불렀다(72쪽). 반촌은 또한 금리와 순라군이 들어가 소란을 피울 수 없는 곳이었다. 곧 금례들은 관현을 넘어 반촌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반촌이 이렇게 금지가 된 것은, 그 내부의 성균관이 공자를 위시한 유가의 성인들을 모신, 성화聖化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82쪽). 반인의 기원은 고려 말 성균관의 재정비에 크게 기여했던 안향安珦(1243~1306)의 사노비私奴婢다. 안향은 성균관에 자신의 녹봉과 노비 100명을 바쳤다고 한다. 고려 말기 성리학을 처음 한반도에 전한 인물로 알려진 안향은 당연히 성균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84쪽). 1746년부터 시행된 《속대전》의 “성균관 노비는 면천을 허락하지 않고, 면천해줄 만한 공로가 있어도 다른 상을 주며, 성균관 외에 다른 역사役事를 시키지 않는다”는 조항으로 구체화되었을 것이다. 반인은 1801년 내수사와 중앙 행정기관의 노비를 혁파할 때 공식적으로 노비 신분에서 해방되었다(88쪽). 반인은 18세기 말이면 1만 명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90쪽). 1707년 대사성 이건명李健命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성균관 전복, 곧 반인의 노동에 대한 수탈이 가혹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대개 공천公賤·사천私賤의 신역의 무거운 것을 말하자면, 성균관의 전복보다 더 한 경우는 없습니다. 옛날 백성을 부리는 것은 한 해 사흘을 넘기지 않았지만, 이 무리들은 1년 안에 여섯 달을 입역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비자婢子에 이르기까지 채모·식모의 역이 있으며, 재직은 7, 8세부터 입역합니다. 한 집안에 늙고 젊고를 물론하고 신역이 없는 사람이 없으니, 그 형편이 정말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108쪽). 유생들은 원래 연청직硯廳直을 마음대로 처벌할 수 없었으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작은 잘못이 있을 경우에도 곧장 회초리와 매를 쳤고, 심지어 채모·식모 역시 작은 과실에도 회초리가 난무하여 여러 곳에서 벌을 받는 일이 있었다(109쪽). 반촌은 평소 성균관 유생들이 방을 잡아 공부하는 숙소이기도 했고, 과거 때면 거자擧子들이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여관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 반인은 자신의 집에 객방客房과 마구간을 마련하고 사족들을 받았다 …… 유생이 반인의 집에 머무를 경우 그 사람을 반주인泮主人이라 불렀다(113쪽). 반주인은 단순한 여각 주인이 아니었다. …… 검주黔州 이웅징李熊徵(1658~1713)은 이렇게 말한다. 성균관은 유생이 모여드는 곳이라 사대부는 반드시 전복을 주인으로 정한다. …… 대궐 뜰에서 합격자를 발표할 때에는 난입하는 잡인을 금하지만 관주인만은 대궐 뜰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 머리에 꽃을 꽂아주게 한다. …… 새로 벼슬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공손치 못한 행동을 하면 반드시 주인에게 죄를 물어 온갖 힘들고 괴로운 일을 겪는다. 그래서 유생이 관직이 높아진 뒤에는 상당히 후하게 보답하게 되고, 주인 역시 사대부를 상전처럼 여겨서 대대로 관계를 전하여 바꾸지 않는다(116쪽). 반인은 사족이 과거에 합격하기 전 유생일 때부터 성균관을 매개로 하여 서로 이익을 공유하는 관계를 형성했다. 사족이 일방적으로 반인을 지배할 수만은 없었다. …… 성균관 대사성이 삼법사의 현방 수탈을 맹렬히 비판했던 것도 사실상 반인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성균관 노비들은 도리어 관료를 움직이기도 했던 것이다(123쪽). 국가가 반인을 계속 성균관과 반촌에 묶어놓기 위해 생계수단으로 제공한 것은 현방의 독점경영권이었다. 곧 서울에서 소를 도축하여 쇠고기를 팔 수 있는 전매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 사족국가 최고의 학교이자 국가이데올로기의 교조敎祖에게 제사를 올리는 신성한 제의소祭儀所는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혹독하게 착취함으로써 겨우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142쪽). 1895년 12월 3일 14개조의 〈포사규칙?肆規則〉이 제정되기 전까지 소의 도축과 쇠고기 판매는 불법이었다. …… 여전히 불법행위였으므로 현방은 벌금, 곧 속전을 납부해야만 했다. 속전은 사실상 세금이었던 것인데, 문제는 그 세금을 받는 곳이 형조·한성부·사헌부 등 이른바 삼법사三法司였다는 것이다. 삼법사는 서울 시내의 불법행위에 대한 단속권을 나눠 갖고 있었다. …… 삼법사는 자신이 거느리는 하예들의 삭료를 지급한다는 명분으로 현방으로부터 속전을 수탈했던 것이다(143쪽). 조선 전기에는 이 일체의 비용은 성균관이 보유한 토지와 노비 등의 재원에서 나왔다. 재원의 관리처는 ‘성균관 유생에게 공급하는 쌀과 콩 등을 관장’하는 종6품 아문인 양현고養賢庫였다. …… 양현고는 섬학전贍學田이라 불리는 전지를 소유했지만, 이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1401년(태종 13) 당시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물과 국 외의 찬을 제공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편이었다(147쪽). 1635년 4월 성균관은 평소 거재생이 80명 이하일 때도 찬물饌物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당시 증광시增廣試와 관시館試에 응시하기 위해 모인 선비들이 240여 명에 이르렀고 또 지방의 선비가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른다고 말한다. 늘어난 유생의 숙식 비용과 과거 응시에 필요한 지필묵은 모두 성균관의 재정에서 나왔던 것이니, 과거를 거치면 성균관의 재정이 궁색해지기 마련이었던 것이다(160쪽). 1602년 성균관의 소 도축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고, 하루 ‘수십’ 혹은 ‘수백 마리’를 도축할 정도로 규모가 커져 있었다. 특히 여기서 ‘수선지지’ 곧 성균관이 ‘도사의 소굴’이 되었다는 말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도사’는 짐승을 도축해서 판매하는 가게의 의미로 쓰인 것이고 현방이 출현한 뒤에는 현방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240쪽). 유본예柳本藝(1777~1842)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현방’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현방. 쇠고기를 파는 도사屠肆다. 고기를 매달아놓고 팔기 때문에 현방이라고 한다. 도성 안팎에 스물 세 곳이 있다. 모두 반민泮民에게 쇠고기를 팔아 생계로 삼게 한다. 세稅로 고기를 바쳐 태학생太學生의 찬거리로 삼는다(242쪽). 1648년까지 형조는 현방으로부터 속전을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한다면, 현방은 1648년 이후 1653년 이전에 출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곧 속전을 내는 현방의 존재는 1648~1653년 사이에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원래 무명으로 바치던 속목은 1678년 상평통보의 유통 이후 돈으로 대신 바치게 되었고 곧 속전이란 명칭으로 불렸다(245쪽). 1792년 광례교 근처에 현방을 신설하고 신설된 현방을 운영할 반인들을 모집했던 바, 70여 호가 몰렸다. 곧 현방 1개에 반인 70여 호가 소속되었던 것이다. 1732년 1월 12일 성균관 대사성 정우량鄭羽良은 현방의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공채를 빌려줄 것을 요청하면서 현방 한 곳에 70~80명이 소속된다고 했다(250쪽). 1675년 성균관 대사성 민종도는 …… 삼법사의 현방 수탈이 과중하다는 것을 최초로 지적한 사람이다. 과중한 속목 혹은 속전이 현방 경영을 압박하고 결과적으로 반인의 삶을 곤궁하게 만든다는 논리로 …… 성균관 대사성이 전면에 나선 데는 당연히 반인들의 요청이 있었다. 반인과 성균관은 이익을 공유하는 일종의 경제공동체였다(264쪽). 태학의 전복은 그 수가 거의 만 명에 이르는데, 다른 생업은 없고 단지 도판屠販(소를 잡아 판매하는 일)을 명줄로 삼고 있습니다. 도성 안의 도사는 모두 21곳인데, 각 현방은 모두 본전이 없습니다. 매일 소를 잡는데 소 값은 모두 사채私債에서 나옵니다. …… 근년에는 전복의 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소 값은 날마다 뛰어올라, 소를 잡아 팔아도 공사公私 비용을 당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287쪽). 현방은 속전을 전혀 내지 않는 잠도潛屠 혹은 사도와 불리한 경쟁을 해야 했고, 한편으로 돼지고기 소비와도 경쟁해야만 했다. …… 본래 48좌였던 현방이 계축년(1673)에 21좌로 줄어든 반면, 시안市案에 기재된 것이 6~7곳에 불과했던 저육전은 70~80좌로 늘어나 있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저육전이 현방의 이익을 갉아먹었음은 물론이다(295쪽). 봉상시는 봄·가을에 한정해서가 아니라, 사철 임의로 도축을 하고 쇠고기를 팔아 이익을 취하고 있어 이로 인해 반인이 이익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송인명은 봄·가을 15일에 한정하여 필요한 양만큼 도축을 허락할 것을 요청했고 영조는 수용했다. 하지만 문제가 봉상시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 형조의 금리가 형조의 담장 밖에서 마음대로 도축하고 가게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시 현방이 이익을 잃는 이유가 되었다(298쪽). 조지빈은 …… 금란속전은 사헌부 관리가 대동하는 겸인과 하리에게 주는 체하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겸인은 ‘청지기’로서 유력한 양반가의 가내 집사를 의미한다. …… 조지빈이 말하는 겸인, 곧 청지기는 정식으로 사헌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개인적인 수행원이다. 하리는 사헌부의 금리일 것이다(302쪽). 사족체제의 정점에 있던 자들은 국가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기구로서, 또는 상징적 기구로서 성균관을 존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실제 그 기구의 재정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고도 근원적인 대책은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성균관의 노비는 더더욱 말할 것이 없었다. 결국 자살하는 노비가 속출하기 시작했다(311쪽). 심성희는 현방의 문제도 거론했다. …… 현방 1곳에 소속되는 반인은 최근 인구 증가로 인해 90여 명이다. 1곳의 현방이 대개 70~80명이 소속되었던 것을 상기하면, 10~20명 정도가 늘었던 것이다. 1인에게 돌아가는 이윤의 몫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심성희에 의하면, 1인에게 돌아가는 도축의 기회는 1년에 3~4차례에 불과하고, 그로부터 얻는 수익은 열흘이나 보름을 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빈약한 것이라고 지적한다(333쪽). 심환지의 말을 직접 옮겨보자. 소 값은 날마다 오르고 전로錢路는 날이 갈수록 황폐해집니다. 각 현방이 매일 도축하는 소는 ‘하루에 1마리’의 정수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종 세금은 여전하여 줄지 않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집이며 가산을 팔아도 부족한 형편입니다. 또 해마다 빚을 내어 대응하는데 그 이자가 불어나 지금은 각 현방마다 지고 있는 빚이 7,000~8,000냥 혹은 만 냥에 이릅니다. 재물은 바닥이 나고 힘이 고갈되어 생계를 꾸릴 수도 응역할 수도 없습니다(349쪽). 현방을 거의 극한까지 수탈하고 또 현방의 이익을 위협하는 일체의 불법적 도축을 금지시키지 못한 결과는 결국 성균관의 기능 마비로 나타났다. 1815년 4월 15일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은 순조에게 성균관 유생의 반미飯米 부족으로 궐공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하고 대책을 마련할 것을 요청했다(353쪽). 4년 뒤인 1819년 12월 식당의 궐공이 일어났다. 그런데 문제는 이전의 궐공에 비해 더 심각했다. 유생들이 궐공으로 인해 즉각 공재空齋에 돌입했던 것이다. 기숙사를 비우고 성균관을 떠난 것이다(365쪽). 1789년 5월 반한泮漢 곧 반인과 궁방의 마직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고 급기야 현방이 철도撤屠, 곧 소의 도축을 정지하여 서울 시내에서 제상祭床에 쇠고기를 올리지 못하고 돼지고기를 올리는 사건이 일어났다(371쪽). 정조는 각 군문의 순라를 도는 군졸이 밤에 현방을 찾아와 돈을 요구하는 일을 막기 위해 ‘고입인가율’을 적용할 것을 허락했는데, 현방에서는 정조의 그 명령 전체를 판에 새겨 현방 앞에 걸었던 것이다(376쪽). ‘방전防錢’이란 새로운 수탈법도 생겨났다. 차인들이 현방에서 도살한 쇠고기를 다 팔고 다음 소를 도살하지 않은 시점에 구하기 어려운 소의 특정 부위를 구입하겠다고 하면 현방에서는 당연히 응할 수가 없었다. 차인들은 그것을 현방의 책임으로 돌리며 윽박질렀고, 현방에서는 미봉책으로 15문文의 ‘방전’을 차인에게 주었다(379쪽). 현방에 진열한 쇠고기를 ‘첩도’라고 하여 속전을 징수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첩도’는 하나의 현방에서 하루 1마리 소를 잡는 규정을 넘어 보다 많은 소를 도축하는 것을 의미했다. 첩도에 관한 허다한 자료들은, 금리가 현방에서 진열한 쇠고기를 첩도라 지목하고 속전을 과다하게 받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컨대 삼법사의 금리들은 단속 건수를 채우지 못하면 현방에 진열된 쇠고기를 첩도한 것이라면서 규정 밖의 속전을 뜯어내었던 것이다(422쪽). 근래 선비는 선비의 도리로 자신을 단속하지 않고, 오직 작은 이익만을 노린다. 모든 이바지하는 물건을 돈으로 받지 않는 경우가 없고 모두 정해진 가격이 있다. 굴비는 2문文, 점심밥은 2문, 대별미는 8문, 소별미는 5문, 명절 별공別供은 30문이다. 그 외 만약 돈으로 대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에 하인배들이 무시하고 미워하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본래 물건까지 바치지 않는다. 둘러대는 말을 하기도 하고 혹은 욕하면서 거절하기도 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더 심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날마다 내놓으라고 다그치고 소리를 질러 꾸짖고 매질을 하는 소리가 걸핏하면 28개 방에 어지럽게 울리는 것이다(471쪽). 최초의 의도적 철도는 1773년에 일어났다. 사도세자

저자
강명관
부산대 국어교육과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나왔으며 성균관대학교에서 조선후기 여항문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93년부터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 후기 여항문학을 조개하는 전문서를 많이 냈다. 2008년 제8회 지훈국학상, 2010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간행물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 《조선의 뒷골목 풍경》, 《공안파와 조선 후기 한문학》, 《농암잡지평석》,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열녀의 탄생》, 《그림으로 읽는 조선 여성의 역사》,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 등이 있다. 공부를 직업으로 택했고 취미 또한 독서이기에 평생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주로 공부방 책주산실(冊酒山室)에서 읽고 쓰는 일을 하며, 시간이 날 때는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책을 뒤적이곤 한다. 그렇게 학자이자 애서가로서 한 권 두 권 사 모은 책은 대단한 희귀본이나 귀중본은 아니지만, 늘 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는 동무가 되어주었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 강명관 | 푸른역사
   열녀의 탄생 | 강명관 | 돌베개
   고전의 힘 | 강명관 | 꿈결
   이 외로운 사람들아 | 강명관 | 천년의상상
   조선왕조실록 | 강명관 | 문학동네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 | 강명관 | 휴머니스트

이 출판사의 관련상품
공공역사를 실천 중입니다 | 김정인,허영란,강성봉,백외준,주진오 외 | 푸른역사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 2: 냉전 반세기 | 장남주,장남주 | 푸른역사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 1: 나치 과거사 | 장남주 | 푸른역사
황제의 말과 글 | 푸른역사
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사 | 푸른역사

이 분야 신간 관련상품
유성룡 기축옥사 | 양성현 | 매거진U
임진왜란과 경상좌도의 의병활동 | 박순진 | 경인문화사
조선의 옥사 바로 알기(큰글자도서) | 김재영 | 한국학술정보
의산문답·계방일기 | 홍대용 | 아르테(arte)
김해에는 정현석 동래에는 정현덕 | 선인
 
도서를 구입하신 고객 여러분들의 서평입니다.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가능합니다만, 서평의 성격에 맞지 않는 글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

등록된 서평중 분야와 상관없이 매주 목요일 5편의 우수작을 선정하여, S-Money 3만원을 적립해드립니다.
0개의 서평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