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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 시간 여행자를 위한 친절한 안내서(큰글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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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백제
저자 김진호 , 김진호
출판사/발행일 역사산책 / 2020.08.30
페이지 수 180 page
ISBN 9791190429030
상품코드 339635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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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내용
2,000년 전의 서울을 찾아가는 여행

누구나 다 알만한 이야기겠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에는 시대마다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등장하기 전에는 또 다른 존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흔적이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땅 속에 다양한 두께의 역사층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에 바빠서 잊고 살 뿐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적 중심이자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도 여러 시대의 흔적들이 쌓여 있습니다. 과거의 유적들은 옛 모습 그대로, 혹은 그때와는 달라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런 과거의 유적들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과거의 전통들을 기억하고 이를 우리의 정체성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한 국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으로서 ‘서울’의 정체성은 언제부터 형성되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제로 1994년 서울시에서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 행사를 거창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뿐만 아니라 전국이 들썩 거릴 정도로 큰 행사의 한쪽에서 조용히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울이 우리 역사의 수도가 된 것은 조선 왕조가 처음이 아니라 2,000년 전의 백제부터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벤트에 목말라 하던 서울시와 일반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이러한 주장은 커다란 호수에 떨어진 자갈 한 개 정도의 파문만 남기고 지나갔습니다. 결국 서울의 역사는 600년으로 축소되었고, 이후 계속된 대규모의 개발은 조선시대 이전의 유적들을 파괴하거나 파괴될 위험에 놓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백제부터 내려온 중심지로서 서울의 역사상을 복원하기 위해 역사연구자들을 비롯한 뜻있는 분들은 쉼 없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개발로 파괴될 위기에 처했던 풍납토성의 재발견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백제의 방어용 성 정도로 알려졌던 풍납토성의 본격적인 발굴로 백제 도성의 웅장함과 백제 도성 사람들의 화려한 생활모습이 하나, 둘씩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비로소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밑바닥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백제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풍납토성 이외에 다양한 한성시기 백제기의 문화유산들은 서울시의 개발 과정에서 제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또한 거대 도시 서울이라는 두껍게 칠해진 화장 밑으로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도 많습니다. 서울에 남아있는 백제의 유적들은 왜 이렇게 홀대를 받았을까요?
그동안 서울은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경쟁의 장이었습니다. 남보다 한 발이라도 더 앞서려는 노력은 빠른 경제 발전을 가져왔지만 뒤처지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물론 과거 유산의 전승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 답하지 않고 ‘오늘을 즐기자’에 몸과 정신을 맡긴 채 살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풍요로운 사회의 안쪽에서 팍팍하고 빈곤한 개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 중 하나인 백제인의 얼굴을 되찾자는 노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서울이 ‘사람 사는 곳’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다양하고 풍부한 인간성을 가져야 합니다. 내 속에 다양하고 풍부한 인간성이 있어야 타인에 대한 이해도 넓어집니다. 한성백제 시간여행은 백제인이라는 과거 사람들을 이해하는 여행입니다. 백제인의 넉넉한 마음과 타인을 이해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서울시민 뿐만 아니라 서울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인간성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큰글자도서 소개 리더스원의 큰글자도서는 글자가 작아 독서에 어려움을 겪는 모든 분들에게 편안한 독서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책 읽기의 즐거움을 되찾아 드리고자 합니다.
목차
프롤로그 / 9

제1장 백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13
1. 백제의 시작·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5
■ 백제의 건국 세력은 누구? / 15
■ 온조와 비류는 친형제인가? / 18
■ 백제의 건국이야기에 신비한 이야기가 없는 이유는? / 19

2. 백제의 발전과 전성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1
■ 마한의 중심국으로 성장한 백제 / 21
■ 근초고왕이 왜에 칠지도를 선물한 까닭은? / 25
■ 백제가 중국의 서쪽을 지배한 대제국이었다고요? / 27
■ 백제의 중앙이 지방을 다스리는 방법은? / 30

3. 삼국의 각축과 웅진 시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32
■ 한강을 둘러싸고 삼국이 싸운 이유는? / 32
■ 왜! 백제는 웅진을 도읍으로 삼았을까? / 34
■ 웅진 천도 초기의 정치 상황 / 36
■ 무령왕 때 다시 강국으로 우뚝 서다 / 38

4. 사비백제 시기와 멸망·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31
■ 성왕이 수도를 사비로 옮긴 이유는? / 31
■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은 익산 천도를 계획했을까? / 42
■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스러진 백제의 꿈 / 46

특집 백제와 일본의 이상한 관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48
■ 백제가 일본을 가르쳤다고? / 48
■ 식민사학의 대표적인 거짓말, 임나일본부설 / 51


제2장 성(城)으로 보는 백제인의 삶 55
1. 성이란 무엇인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57
■ 우리나라를 ‘성곽의 나라’라고 하는 이유는? / 57
■ 거주하는 사람에 따라 성곽을 분류하면? / 60
■ 성 쌓는 재료에 따라 성곽을 분류하면? / 64
■ 서로 다른 고대 삼국의 성곽 / 69

2. 백제의 도성, 풍납토성·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3
■ 한성 백제 도성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 / 73
■ 소외받고 상처 입은 풍납토성(발굴의 역사) / 76
■ 백제 축성 기술의 결정체, 풍납토성 / 82
■ 발굴을 통해 드러난 풍납토성의 건축 과정과 시기 / 87

3. 풍납토성 둘러보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90
■ 성벽이 잘 남아있는 북벽과 동벽 / 90
■ 신성한 공간, 경당역사공원 / 92
■ 풍납백제 문화공원 / 96
■ 개발과 보존의 기로에 섰던 풍납토성 / 100

4. 몽촌토성 둘러보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04
■ 몽촌토성이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까닭은? / 104
■ 몽촌토성이 꿈마을로 불린 까닭은? / 109
■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의 관계는? / 111
■ 개로왕이 흙을 쪄서 성을 쌓았다고? / 116

5. 유물로 보는 백제의 강남 스타일· · · · · · · · · · · · · · · · · · · · · · · · · · · 121
■ 최고 수준의 토기가 사용된 한성백제 / 122
■ 기와와 벽돌로 보는 백제의 건축 / 124
■ 옷과 꾸미개로 보는 세련된 백제의 패션 / 128
■ 집자리로 보는 백제인의 주거 생활과 식생활 / 132

특집 해상 강국 백제의 대외 교류·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37
■ 뛰어난 백제의 항해술과 선박 / 137
■ 수입 명품으로 보는 백제의 대외 교류 / 139


제3장 고분에 담긴 백제인의 죽음 143
1. 백제인이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 · · · · · · ·프롤로그 / 9 제1장 백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13 1. 백제의 시작·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5 ■ 백제의 건국 세력은 누구? / 15 ■ 온조와 비류는 친형제인가? / 18 ■ 백제의 건국이야기에 신비한 이야기가 없는 이유는? / 19 2. 백제의 발전과 전성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1 ■ 마한의 중심국으로 성장한 백제 / 21 ■ 근초고왕이 왜에 칠지도를 선물한 까닭은? / 25 ■ 백제가 중국의 서쪽을 지배한 대제국이었다고요? / 27 ■ 백제의 중앙이 지방을 다스리는 방법은? / 30 3. 삼국의 각축과 웅진 시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32 ■ 한강을 둘러싸고 삼국이 싸운 이유는? / 32 ■ 왜! 백제는 웅진을 도읍으로 삼았을까? / 34 ■ 웅진 천도 초기의 정치 상황 / 36 ■ 무령왕 때 다시 강국으로 우뚝 서다 / 38 4. 사비백제 시기와 멸망·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31 ■ 성왕이 수도를 사비로 옮긴 이유는? / 31 ■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은 익산 천도를 계획했을까? / 42 ■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스러진 백제의 꿈 / 46 특집 백제와 일본의 이상한 관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48 ■ 백제가 일본을 가르쳤다고? / 48 ■ 식민사학의 대표적인 거짓말, 임나일본부설 / 51 제2장 성(城)으로 보는 백제인의 삶 55 1. 성이란 무엇인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57 ■ 우리나라를 ‘성곽의 나라’라고 하는 이유는? / 57 ■ 거주하는 사람에 따라 성곽을 분류하면? / 60 ■ 성 쌓는 재료에 따라 성곽을 분류하면? / 64 ■ 서로 다른 고대 삼국의 성곽 / 69 2. 백제의 도성, 풍납토성·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3 ■ 한성 백제 도성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 / 73 ■ 소외받고 상처 입은 풍납토성(발굴의 역사) / 76 ■ 백제 축성 기술의 결정체, 풍납토성 / 82 ■ 발굴을 통해 드러난 풍납토성의 건축 과정과 시기 / 87 3. 풍납토성 둘러보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90 ■ 성벽이 잘 남아있는 북벽과 동벽 / 90 ■ 신성한 공간, 경당역사공원 / 92 ■ 풍납백제 문화공원 / 96 ■ 개발과 보존의 기로에 섰던 풍납토성 / 100 4. 몽촌토성 둘러보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04 ■ 몽촌토성이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까닭은? / 104 ■ 몽촌토성이 꿈마을로 불린 까닭은? / 109 ■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의 관계는? / 111 ■ 개로왕이 흙을 쪄서 성을 쌓았다고? / 116 5. 유물로 보는 백제의 강남 스타일· · · · · · · · · · · · · · · · · · · · · · · · · · · 121 ■ 최고 수준의 토기가 사용된 한성백제 / 122 ■ 기와와 벽돌로 보는 백제의 건축 / · · · · · · · · · · · · · · · · · · · · 145
■ 고분이란? / 145
■ 무덤의 주인공에 따라 고분을 분류하면? / 146
■ 무덤의 구조와 매장 방식에 따라 고분을 분류하면? / 148

2. 한성백제 시기 지배층의 무덤, 석촌동 고분군· · · · · · · · · · · · · · · · · · · · · 151
■ 돌마을로 불린 석촌동 고분군 / 152
■ 개발 과정에서 훼손된 석촌동 고분군 / 153
■ 석촌동 고분군에 묻힌 사람들은 누구일까? / 156

3. 석촌동 고분군 둘러보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57
■ 석촌동 고분군의 돌무지 무덤 / 157
■ 석촌동 고분군 중 근초고왕의 무덤은 어디일까? / 159
■ 석촌동 고분군의 다양한 무덤들 / 162

4. 백제인 듯 백제 아닌 방이동 고분군 · · · · · · · ·· · · · · · · · · · · · · · · · · · 164

특집 한성백제의 유적과 유네스코 세계유산· · · · · · · · · · · · ·· · · · · · · · · · · 167
■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대해서 / 167
■ 한성백제 유적이 세계유산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 / 171

에필로그 / 174 124 ■ 옷과 꾸미개로 보는 세련된 백제의 패션 / 128 ■ 집자리로 보는 백제인의 주거 생활과 식생활 / 132 특집 해상 강국 백제의 대외 교류·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37 ■ 뛰어난 백제의 항해술과 선박 / 137 ■ 수입 명품으로 보는 백제의 대외 교류 / 139 제3장 고분에 담긴 백제인의 죽음 143 1. 백제인이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 · · · · · · · · · · · · · · · · · · · · · · · · · · · 145 ■ 고분이란? / 145 ■ 무덤의 주인공에 따라 고분을 분류하면? / 146 ■ 무덤의 구조와 매장 방식에 따라 고분을 분류하면? / 148 2. 한성백제 시기 지배층의 무덤, 석촌동 고분군· · · · · · · · · · · · · · · · · · · · · 151 ■ 돌마을로 불린 석촌동 고분군 / 152 ■ 개발 과정에서 훼손된 석촌동 고분군 / 153 ■ 석촌동 고분군에 묻힌 사람들은 누구일까? / 156 3. 석촌동 고분군 둘러보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57 ■ 석촌동 고분군의 돌무지 무덤 / 157 ■ 석촌동 고분군 중 근초고왕의 무덤은 어디일까? / 159 ■ 석촌동 고분군의 다양한 무덤들 / 162 4. 백제인 듯 백제 아닌 방이동 고분군 · · · · · · · ·· · · · · · · · · · · · · · · · · · 164 특집 한성백제의 유적과 유네스코 세계유산· · · · · · · · · · · · ·· · · · · · · · · · · 167 ■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대해서 / 167 ■ 한성백제 유적이 세계유산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 / 171 에필로그 / 174
본문중에서
■ 백제의 건국 세력은 누구?
가까이는 1,500년 전, 멀리는 2,000년도 훨씬 전에 있었던 나라들에 대해서 우리가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들과 땅 속 혹은 땅 위에 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연구하여 수천 년 전 과거의 모습을 그려볼 뿐입니다. 그나마 이러한 추정도 실제 과거의 모습과 얼마나 비슷한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와 TV 드라마에서 대충대충 역사극을 만들어도 다들 그러려니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전해지는 역사책 속의 기록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어림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에 대한 기록으로는 우리 역사책으로 고려시대에 편찬된[삼국사기]와[삼국유사]가 있고, 중국의 역사책에 한반도와 그 주변의 나라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중 백제를 비롯한 삼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헌 자료는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삼국사기] 입니다.[삼국사기]에 실린 백제의 건국 이야기를 볼까요?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인데, 이 사람은 난을 피하여 북부여에서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이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를 온조라고 불렀다. (중략)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북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는데 이때가 기원전 18년이다.

위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지금의 서울 지역에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 북부여·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세력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삼국사기]의 또 다른 기록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라는 기록은 백제 왕실의 성씨인 ‘부여’씨가 부여 계승 의식에 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5세기 개로왕이 중국 북위에 보낸 국서에도 부여 계승 의식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특히 이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여를 같은 조상으로 두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국가 발전 과정에서 친선 관계가 아닌 경쟁 관계로 변화되었음을 보여 줍니다.[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중국측 기록에도 백제와 고구려가 같은 부여 계통임을 보여 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백제의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 “백제의 왕실이 부여계이다”, “백제국이 부여의 별종(別種)으로 마한의 옛 땅에 세워졌다” 등의 기록들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 고구려와 관계가 있다는 점을 잘 보여 줍니다.

■ 온조와 비류는 친형제인가?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졸본왕의 둘째 딸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동생 온조를 중심으로 하는 백제 건국 이야기 뒤에 조그마한 글씨로 붙어있는 형 비류 이야기는 약간 다릅니다. 비류 이야기에서는 두 형제의 어머니가 소서노이고, 친아버지는 우태(優台)입니다. 그리고 주몽은 우태가 죽은 후 과부가 된 소서노를 왕비로 삼아 온조와 비류의 양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소서노 세력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같은 기록 속에 온조와 비류 두 형제의 친아버지를 다르게 쓰다니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역사학자들이 이런 기록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가령 역사 기록이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을 수도 있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기록도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온조와 비류가 진짜 주몽의 아들이라는 기록의 상징적인 의미를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즉 비류와 온조는 친형제라기보다는 각각 자신의 출신을 부여와 고구려라고 내세운 독자적인 정치 집단의 우두머리로 생각한 것입니다. 비류와 온조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비록 친부인지 양부인지 헷갈리지프롤로그 2,000년 전의 서울을 찾아가는 여행 누구나 다 알만한 이야기겠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에는 시대마다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등장하기 전에는 또 다른 존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흔적이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땅 속에 다양한 두께의 역사층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에 바빠서 잊고 살 뿐입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적 중심이자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도 여러 시대의 흔적들이 쌓여 있습니다. 과거의 유적들은 옛 모습 그대로, 혹은 그때와는 달라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런 과거의 유적들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과거의 전통들을 기억하고 이를 우리의 정체성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한 국가의 정치ㆍ경제ㆍ문화의 중심으로서 ‘서울’의 정체성은 언제부터 형성되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제로 1994년 서울시에서는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 행사를 거창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뿐만 아니라 전국이 들썩 거릴 정도로 큰 행사의 한쪽에서 조용히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울이 우리 역사의 수도가 된 것은 조선 왕조가 처음이 아니라 2,000년 전의 백제부터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벤트에 목말라 하던 서울시와 일반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이러한 주장은 커다란 호수에 떨어진 자갈 한 개 정도의 파문만 남기고 지나갔습니다. 결국 서울의 역사는 600년으로 축소되었고, 이후 계속된 대규모의 개발은 조선시대 이전의 유적들을 파괴하거나 파괴될 위험에 놓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백제부터 내려온 중심지로서 서울의 역사상을 복원하기 위해 역사연구자들을 비롯한 뜻있는 분들은 쉼 없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개발로 파괴될 위기에 처했던 풍납토성의 재발견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백제의 방어용 성 정도로 알려졌던 풍납토성의 본격적인 발굴로 백제 도성의 웅장함과 백제 도성 사람들의 화려한 생활모습이 하나, 둘씩 드러났습니다. 사람들은 비로소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밑바닥에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백제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풍납토성 이외에 다양한 한성시기 백제기의 문화유산들은 서울시의 개발 과정에서 제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습니다. 또한 거대 도시 서울이라는 두껍게 칠해진 화장 밑으로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도 많습니다. 서울에 남아있는 백제의 유적들은 왜 이렇게 홀대를 받았을까요? 그동안 서울은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경쟁의 장이었습니다. 남보다 한 발이라도 더 앞서려는 노력은 빠른 경제 발전을 가져왔지만 뒤처지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물론 과거 유산의 전승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에 답하지 않고 ‘오늘을 즐기자’에 몸과 정신을 맡긴 채 살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풍요로운 사회의 안쪽에서 팍팍하고 빈곤한 개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 중 하나인 백제인의 얼굴을 되찾자는 노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서울이 ‘사람 사는 곳’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다양하고 풍부한 인간성을 가져야 합니다. 내 속에 다양하고 풍부한 인간성이 있어야 타인에 대한 이해도 넓어집니다. 한성백제 시간여행은 백제인이라는 과거 사람들을 이해하는 여행입니다. 백제인의 넉넉한 마음과 타인을 이해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서울시민 뿐만 아니라 서울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인간성을 더욱 풍부하게 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본문 중에서 1. 백제의 시작 ■ 백제의 건국 세력은 누구? 가까이는 1,500년 전, 멀리는 2,000년도 훨씬 전에 있었던 나라들에 대해서 우리가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들과 땅 속 혹은 땅 위에 있는 유적과 유물들을 연구하여 수천 년만) 백제 세력이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라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후대에 만든 이야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가설을 조금 더 확대해 봅시다. 비류와 온조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온 세력인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온조가 한강 유역에 거점을 둔 소국인 십제국을 건국하고,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비류국을 건설한 각각 독자적인 세력이었습니다. 이후 조그만 소국 단계의 십제국과 비류국이 통합되어 연맹왕국 단계의 백제국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제국과 비류국 중에서 어느 나라가 백제국을 주도했을까요?[삼국사기] 기록이 온조를 중심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바로 정답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미추홀에 나라를 세운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온조의 위례성으로 흡수되었고, 비류는 미추홀에서 후회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후 온조는 비류가 이끌었던 백성들을 모두 받아들여 나라의 이름을 십제국에서 백제국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을 보면 십제국과 비류국의 통합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은 온조의 십제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조와 비류의 후손들은 서로 권력을 놓고 다투기보다는 모두 왕족으로서 이후 백제의 중심 세력으로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 '1. 백제의 시작' 중에서) 전 과거의 모습을 그려볼 뿐입니다. 그나마 이러한 추정도 실제 과거의 모습과 얼마나 비슷한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와 TV 드라마에서 대충대충 역사극을 만들어도 다들 그러려니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전해지는 역사책 속의 기록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어림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에 대한 기록으로는 우리 역사책으로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고, 중국의 역사책에 한반도와 그 주변의 나라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중 백제를 비롯한 삼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헌 자료는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입니다.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의 건국 이야기를 볼까요?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인데, 이 사람은 난을 피하여 북부여에서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이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를 온조라고 불렀다. (중략)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북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는데 이때가 기원전 18년이다. 위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지금의 서울 지역에 백제를 건국한 세력이 북부여·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세력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또 다른 기록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온조)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라는 기록은 백제 왕실의 성씨인 ‘부여’씨가 부여 계승 의식에 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5세기 개로왕이 중국 북위에 보낸 국서에도 부여 계승 의식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특히 이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여를 같은 조상으로 두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국가 발전 과정에서 친선 관계가 아닌 경쟁 관계로 변화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중국측 기록에도 백제와 고구려가 같은 부여 계통임을 보여 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백제의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 “백제의 왕실이 부여계이다”, “백제국이 부여의 별종(別種)으로 마한의 옛 땅에 세워졌다” 등의 기록들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 고구려와 관계가 있다는 점을 잘 보여 줍니다. ■ 온조와 비류는 친형제인가?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졸본왕의 둘째 딸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동생 온조를 중심으로 하는 백제 건국 이야기 뒤에 조그마한 글씨로 붙어있는 형 비류 이야기는 약간 다릅니다. 비류 이야기에서는 두 형제의 어머니가 소서노이고, 친아버지는 우태(優台)입니다. 그리고 주몽은 우태가 죽은 후 과부가 된 소서노를 왕비로 삼아 온조와 비류의 양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소서노 세력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같은 기록 속에 온조와 비류 두 형제의 친아버지를 다르게 쓰다니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역사학자들이 이런 기록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가령 역사 기록이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을 수도 있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기록도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온조와 비류가 진짜 주몽의 아들이라는 기록의 상징적인 의미를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즉 비류와 온조는 친형제라기보다는 각각 자신의 출신을 부여와 고구려라고 내세운 독자적인 정치 집단의 우두머리로 생각한 것입니다. 비류와 온조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비록 친부인지 양부인지 헷갈리지만) 백제 세력이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라는 점을 과시하기 위해 후대에 만든 이야기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가설을 조금 더 확대해 봅시다. 비류와 온조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온 세력인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온조가 한강 유역에 거점을 둔 소국인 십제국을 건국하고,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에 비류국을 건설한 각각 독자적인 세력이었습니다. 이후 조그만 소국 단계의 십제국과 비류국이 통합되어 연맹왕국 단계의 백제국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제국과 비류국 중에서 어느 나라가 백제국을 주도했을까요? ?삼국사기? 기록이 온조를 중심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바로 정답을 알 수 있습니다. 기록을 보면 미추홀에 나라를 세운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온조의 위례성으로 흡수되었고, 비류는 미추홀에서 후회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후 온조는 비류가 이끌었던 백성들을 모두 받아들여 나라의 이름을 십제국에서 백제국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을 보면 십제국과 비류국의 통합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은 온조의 십제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조와 비류의 후손들은 서로 권력을 놓고 다투기보다는 모두 왕족으로서 이후 백제의 중심 세력으로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저자
김진호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한신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안산 원곡고등학교에서 국가와 민족 중심의 박제된 역사가 아닌 생생하고 재미있는 역사, 타인을 이해하는 힘을 기르는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뜻있는 교사들과 함께 체험학습 연구회 ‘모아재’ 중등모임을 만들어 문화유산과 박물관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만들고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과학이 깃든 고대고분』, 『경산 압독국』, 『생각이 열리는 창체 한국사』(공저) 등이 있다.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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