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 유통경제사의 공백을 메워줄 연구서” 저자도 고백하듯, ‘고대사회’와 ‘유통’이라는 말의 조합은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의 눈에는 쉽게 와 닿지 않는다. Fedex, DHL 같은 ‘유통’(‘유통경제’)이 현대경제의 발명인 양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혹은 유교 전통의 ‘농본주의(중농주의)’나 ‘억상주의’에 우리의 사고가 관념적으로 잠재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간 우리 학계가 식민사관의 극복을 위한 자생적 근대화론,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의 맹아를 찾는 작업에 집착하여 실증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고려·조선을 중심으로 한 연구에 치우쳐왔고 또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도 유교의 ‘억상주의’라는 허상의 이념에 얽매여 상업사 연구에 깊이 천착하지 않은 점 역시 쉽사리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번에 출간된 ‘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 연구’는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이 연구서는 고려나 조선의 상업사 연구에 비해 여러 이유로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미진했던 한국고대 (유통)경제사의 공백을 메워주고 있어 학계에 큰 의미를 줄 것 같다. 저자는 문헌사료의 부족을 각종 교역품을 비롯하여 목간과 고대 화폐 등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물론, 각국의 연구성과, 상업사·유통경제사 등 유관 자료를 이 책에서 적극 활용하는 한편, 방법론에서도 인류학과 고고학 등 인접 학문의 이론을 접목하여 부족한 사료에서 풍성한 해석을 끌어내려 한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증여론Essai sur le don’의 ‘증여와 답례’를 통해 집단과 집단, 집단과 개인, 집단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물자의 이동과 재분배를 유통의 원초적 형태로 파악하는 저자는, 기존 연구들이 상행위를 경제 행위라는 제한된 좁은 시각에서 이해했던 점들을 비판하면서 상행위에 담긴 주술적, 신화적, 종교적 속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한국경제사, 특히 유통경제사(상업사) 연구가 고려 이전 시기를 대상으로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최근의 연구 동향을 볼 때, 이 책의 출간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저자도 지적한 것처럼, 아직 불교와 도교 등 종교의 상업관 검토, 유통경제의 공간인 시장 등 유통조직과, 사찰지의 위치나 방리 구획 변화에 대한 구체적인 점검, 대외교역과 국내상업의 관계, 이후 이어질 고려와 조선의 연계 문제, 그리고 재정 운영체계의 차이에 관한 탐색 등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지만, 향후 더 나은 결실을 맺기 위해 이 책이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한편 이 책은 이번 출간을 위해 1940년 조선총독부가 출간한 ‘조선보물고적도록’(제2권)을 비롯한 20여 장의 도판을 추가하여, 자칫 학술서가 빠지기 쉬운 무미건조함을 탈피하고 있어 독자들의 책읽기의 즐거움도 배가될 것이다. - - ◆ 책의 내용 - 청동기·철기 문화로 사회분화가 촉진되면서 하나의 중심집단이 여러 주변집단에 대해 통제력을 강화해나가고, 소위 ‘고대왕권=국가체제’를 형성하는 고대 국가권력은 제정을 관장하는 성소 곧 제사와 정무 기능을 담당하던 신성처들을 흡수하면서 체제를 정비한다. 바로 그 배경에 필연적으로 ‘시’의 원초적 기능과 성격에 변화가 있었다는 점에서 저자는 먼저 ‘시’의 기원을 탐색한다. ‘신청처’로 기능하던 소도·정·혈·사령지·칠처가람 등까지 포함하여 고조선의 제의와 정무 기능을 담당하던 ‘신시’ 같은 성소들이 중앙집권력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세속권력에게 제사장적 성격을 박탈당하고, 결국 시는 상업지구로 변화되고 노구 같은 샤먼(무격)들은 준관료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서 특히 저자는 이들 성소의 역할 가운데 신창과 재분배 기능을 주목한다. ‘경’ ‘부경’으로 불리는 이들 고상창고는 왕권 성립 이래로 제수용품이나 잉여생산물, 전리품과 공납물 등을 취합하던 곳이었다. 이 물품들은 왕실(지배층) 유지를 위한 소비물로, 기근 등 위난 시기에 민들을 진휼·구제하는 재분배 기능을 맡았다. 삼한에서 삼국 초기까지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성소들의 신창과 재분배 기능은 국가가 주도하는 유통경제체제인 ‘관상-관시체제’로 전개되어 나아가는 중요한 시발점이라고 본다. 고대왕권의 집권체제는 국가 주도로 동시·남시·서시라는 이른바 ‘3시’를 개설하고 시장제도를 마련하면서 본격적인 유통체제를 구축한다. 체제 내로 흡수된 샤먼들은 ‘집사부’ 같은 기구의 설치로 왕권에 흡수되면서도 본래 지니고 있던 제사장의 종교적(점복·자문), 경제적(제물 조달), 정치적(제천행사로 민 통합) 성격을 여전히 유지했다. 그리고 국가 주도의 유통체계 내에서 국가로부터 특권을 보장받는 ‘관상으로 전화하여, 왕경의 거주인(귀족 관인)과 관부의 물자를 공급했다고 논증한다. 과거 성소의 제수용품을 조달하던 이들 관상은 ‘관시-관상체제’ 아래 국가의 통제를 받는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시사 설치와 우역제도, 관도 정비와 더불어 조세의 수취와 지출이라는 국가 재정 면에서 왕경 등에 설치된 여러 관시는 더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한다. 제3장과 제4장의 경우 고대왕권이 성립되고 구체적인 제도로 자리잡은 신라의 ‘창부’ 설치와 ‘창고제도’의 구체적 양상과 현물화폐를 포함한 고대 화폐 문제를 점검하고 있다. 운송·체계의 의 정비와 구휼·진휼, 행정구역의 정비를 통해, 국가 유통체계의 본령이라 할 조세 수취와 운송로의 구체적 모습들을 부산성과 경주 황남동 376유적에서 출토된 목간 분석을 통해 알아보고 있다. 한편 한반도 각지에서 출토되는 중국의 고대 화폐들을 통해 국내에 구축된 상업 기반 위에서 국가 간의 교역의 규모와 실상, 물자의 유통, 또 국가 재정에 어떻게 운영되고 기능했는지 살펴본다. 통일신라의 하대에 불거진 국가 기강의 이완으로 말미암아 지방 상업세력이 기왕의 국가가 주도하던 유통체계를 포함하면서 관상의 영역까지 장악했던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관상 통제력 이완의 이면에는 삼국 이래 성장해온 민간 상인의 존재와 관시의 자율성을 확대해가던 일련의 움직임이 맞물려 나타났다. 특히 일본의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묘사된 통일신라 하대의 경우, 지역에서 독자적 정치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세력들(장보고의 해상세력의 대내외 교역, 나말여초의 왕건 등)은 기존의 유통체계를 활용하면서 지방에 독자적인 ‘유통망’을 형성해감으로써 당시 붕괴 일로를 치닫고 있던 하대 국가 주도의 유통체계를 대체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왕건의 경우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라의 일부 귀족, 지방의 반란세력 등과 연계하여 끝내는 국가권력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 책을 펴내며 - 서론 1. 기존 연구의 성과와 문제점 2. 연구의 방법과 특징 3. 관련 용어 검토 : 유통·교환·교역의 개념 - [ 제1장 시의 원형과 성격 변화 ] 1. 시의 원형과 기능 2. 시의 성격 변화 - [ 제2장 관상의 기원과 관시체제 ] 1. 관상의 기원 2. 관시의 구조와 기능 3. 수공업 생산과 관시 - [ 제3장 창고제의 성립과 운영 ] 1. 창고제의 성립 과정 2. 창고제의 정비와 운영 3. 조세 수취와 운송체계 - [ 제4장 현물화폐의 유통과 재정 ] 1. 중국 고대 화폐의 유입과 유통 2. 현물화폐의 유통과 재정 운영 3. 고대의 금속화폐 사용 문제 - [ 제5장 민간 상업의 발달과 유통체계의 변화 ] 1. 민간 상업의 발달 2. 신라 하대 유통체계의 변화 - - 결론 1. 국가 주도 유통체계의 성립과 변천 2. 삼국과 통일신라 상업의 특성 3. 연구의 한계와 과제

“고조선 초기의 최고 신성처이던 신시 는 정무기능과 제의기능이 뒤섞인 정교의 중심이었다. 삼한의 읍락공동체, 부여, 고구려의 부 집단도 이러한 신성처를 중심으로 한 제정 미분리 단계를 거쳤다. 정무기능, 제의기능과 함께 범죄자의 은닉과 재판·처형과 사면·창고와 재분배기능 등이 신성처의 원초적 기능이었다. 따라서 원래 제의 장소로서 출발한 시에서 상업 같은 세속적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최고 신성처의 원초적 기능 가운데 하나인 창고기능도 신전의 수확물, 공납물, 그리고 제수용품으로 조달된 대외교역품 등 특별한 물품을 보관하고 재분배한 것이지, 이러한 활동이 상거래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 시기 국가 간의 공식적인 대외교역품은 수장층에게 공급되어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데 사용되거나 제사용품으로 충당되었을 뿐, 시장에 유입되어 거래될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민간 상거래도 상인이 직접 수요자의 거처를 방문하여 판매하는 형태가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여, 상품 거래 공간으로서 시장에 대한 요구가 사회적으로 성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중앙집권력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출현한 삼국시기의 시 는 분명히 상업 활동의 장이었다. 이제 최고 신성처가 수행하던 복합적 기능 가운데 신창과 재분배 기능이 분화되어 ‘시’라는 상업지구가 형성되는 과정과 그 정치·사회적 배경을 살펴보겠다. 이는 관상, 관시 를 중심으로 하여 국가가 주도하는 유통체제가 성립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래 복합적 기능을 수행하던 최고 신성처는 서서히 정무와 창고기능을 상실하여, 삼국 초기에는 전통적인 제의가 행해지는 종교적 장소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세속권력에 예속되어 권력의 정당성을 비호하고 사회 통합을 관념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 제1장 53～54쪽에서 “왕건은 신라 말 상인층 활동의 정점을 보여준다. 왕건의 조상은 지방 부호 출신으로, 그 주요한 경제기반은 대내외 교역 활동을 통해 축적한 것이다. 920년(경명 4) 고려는 송악에 유시 를 설치했는데, 새로운 정치적 거점에 품목별 시장이 출현한 것으로 주목된다. 종래에는 보이지 않던 전문 시장의 등장은 왕건 세력의 다양한 상업 활동 경험이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처럼 지방세력은 독자적인 정치·군사기반과 유통조직을 이용하여, 활동 지역에 유통망을 형성함으로써 붕괴되어가던 신라의 국가 주도 유통체계를 대체해갔다. 왕건은 이를 기반으로 신라의 일부 귀족, 지방의 반란세력과 연계하여 국가권력까지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즉위 후 ‘취민유도’를 표방하며 조세액을 경감한 것은 태봉 시기부터 그 지배 영역 내에서 독자적으로 조세 수취를 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상업 활동을 통한 물자 유통뿐 아니라, 종래 신라 국가의 고유 영역이었던 조세 수취와 지급을 통한 유통 부문까지 지방세력이 장악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신라 말의 혼란 속에서 대내외 교역 활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정권을 장악했으며, 종래 신라 국가가 수행하던 물자 유통체계를 전면적으로 대체해갔다는 점에서, 왕건 세력과 그 상업활동이 한국 고대 유통경제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제5장 232～233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