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구매홈 >
역사와 문화
>
한국사
>
삼국시대

펼쳐보기
신라인은 삼국 통일을 말하지 않았다
정가 18,000원
판매가 16,200원 (10% , 1,800원)
I-포인트 180P 적립(1%)
판매상태 판매중
분류 삼국시대
저자 신형준
출판사/발행일 학고재 / 2017.07.17
페이지 수 448 page
ISBN 9788956253558
상품코드 268607314
가용재고 재고부족으로 출판사 발주 예정입니다.
 
주문수량 :
대량구매 전문 인터파크 대량주문 시스템을 이용하시면 견적에서부터 행정서류까지 편리하게 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도서를 견적함에 담으시고 실시간 견적을 받으시면 기다리실 필요없이 할인받으실 수 있는 가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매주 발송해 드리는 인터파크의 신간안내 정보를 받아보시면 상품의 선정을 더욱 편리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대량구매홈  > 역사와 문화  > 한국사  > 삼국시대
 대량구매홈  > 역사와 문화  > 한국사  > 통일신라

 
책내용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는가? 더 나아가, 신라인들은 삼국을 통일했다고 스스로 자부했을까? 본질적인 질문으로 교과서 속 역사 기술에 의문을 제기하다 모든 한국사 교과서가 ‘신라의 삼국 통일’을 역사적 사실로 적고 있다. 『신라인은 삼국 통일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렇게 교과서에 흔들리지 않는 사실로 각인된 ‘신라의 삼국 통일’에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저자의 질문은 본질적이어서 더욱 도발적이다. 첫째 질문 백제는 660년, 고구려는 668년 멸망했다. 신라는 두 나라가 멸망한 뒤 당나라와의 전쟁을 거쳐 676년 대동강~원산만 이남 통일을 이뤘다. 신라의 통일이 완성된 시기를 668년으로 보든, 676년으로 보든 당시 신라의 왕은 문무왕이었다. 한국사 교과서도 통일 임금으로 문무왕을 꼽는다. 그런데, 신라인들은 통일을 이룩한 군주로 문무왕이 아니라, 태종 무열왕을 꼽았다. 661년에 사망한 태종 무열왕은 백제의 멸망만 지켜봤을 뿐이다. 신라인들은 왜 고구려 멸망은커녕 고구려와 제대로 대결조차 한 적 없는 태종 무열왕을 통일 군주로 꼽았을까? 둘째 질문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자부했다면 당연히 ‘삼국 통일’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신라인들은 삼국 통일이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았다. 대부분 ‘삼한 통일’이라는 표현을 썼다. 신라인들은 왜 ‘삼한 통일’이라는 표현을 고집했을까? 셋째 질문 신라인들은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라고 생각했다. 발해가 고구려의 옛 땅 대부분을 차지하고 건국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신라인들이 ‘우리 선조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자부했다면 발해 건국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을 것이다. ‘통일 신라’를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발해 건국에 관심이 없었다. 발해가 강성한 국가로 자리 잡고도 ‘신라의 통일은 잘 유지되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고려나 후백제가 건국한 신라 최말기에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고 비탄에 잠긴 것과 대조된다. 신라인들은 왜 발해 건국, 그러니까 고구려 부활에 무관심했을까?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도 본질적으로 찾았다. 신라인은 물론, 고구려인이나 백제인이 남긴 모든 기록 유물을 전수 조사한 것이다. 그 과정을 거쳐 ‘신라인 대부분은 신라가 삼국 통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상 처음 논증했다. 한국사학계에도 소수이긴 하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부정하는 주장이 있다. 백제와 고구려, 그리고 당과 전쟁을 마친 뒤(이 책에서는 이를 ‘통일 전쟁’이라고 부른다) 신라가 차지한 영역이 대동강~원산만 이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부정하는 한국사학자들도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에는 의문을 두지 않았다. 저자는 ‘신라인들의 통일관’을 살피기 위해 ① 돌이나 토기 혹은 쇠붙이 등에 신라인이 직접 써서 남긴 모든 금석문, ② 원효나 최치원 등 신라인의 글을 모은 문집, ③ 우리나라에 남은 고구려나 백제의 기록 유물은 물론 당나라로 건너간 고구려나 백제 유민의 묘지명(죽은 이의 행적을 적어 무덤에 넣은 글), ④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이렇게 네 가지 항목 자료를 전수 조사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우리가 믿어온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인다. 우리 역사 속 오류와 모순을 바로잡을 기회가 왔다 저자는 한국사학계의 주장처럼 ‘삼국=삼한론’을 펼칠 때 닥칠 수 있는 후폭풍을 지적한다.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따라가면, 중국의 ‘제2의 동북공정’, 그러니까 고구려나 발해가 중국 지방 정권의 하나였다는 주장(기존 동북공정)이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될 위험과 맞닿게 된다. 7세기 이후 중국측 기록에는 ‘삼한=삼국’이 많이 보인다. 애초 삼한이란 표현은 중국이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나라나 종족에 대해 일종의 ‘인류학적 보고서’를 쓰면서 역사서에 처음 등장했고, 이때 삼한은 요즘 말로 하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 정도로 묘사됐다. 조국 멸망 뒤 당나라로 건너간 고구려나 백제 유민들도 ‘삼한=삼국’을 받아들였다. 한데 여기서 삼한은 모두 당나라의 영토, 혹은 지배 지역으로 묘사돼 있다. 특히 ‘삼한=삼국’을 받아들인 고구려나 백제 유민들의 기록에 등장하는 ‘삼한’은 100% 당의 영토였다.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 중 7세기 중엽 이후 ‘삼한’을 언급한 묘지명은 모두 삼한을 당나라가 차지한 곳으로 기술했다. 심지어 고구려의 옛 땅을 발해가 차지한 상황에도 삼한은 당나라 영토인 것처럼 표현했다. 백제 유민의 것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국제정세를 묘사한 백제 유민의 묘지명도 모두 백제 지역마저 당이 차지한 것처럼 말한다. 물론 고구려나 백제 유민이 보인 ‘삼한은 당나라 영토’라는 표현은 당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사학계가 중국에서 비롯된 용례 변화를 바탕으로 필요에 따라 ‘삼한=삼국’을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 담긴 ‘정치적 함의의 변화’, 즉 ‘삼한은 당나라의 영토’라는 변화된 뜻에 대해 입을 다문다면 이는 학문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더 나아가 이런 식의 주장, 그러니까 ‘삼한=삼국’이라는 주장이 중국에 의해 악용된다면, 더 심화된 ‘동북공정’이 나올 수도 있다. 이제 한국사학계가 설명해야 한다 ‘신라인이 삼국 통일을 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하려면 아래 의문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① 왜 신라인들은 통일을 이룩한 왕으로 현재 사학계처럼 문무왕이 아니라 무열왕을 꼽았을까? ② 고구려를 발해가 계승했다고 여긴 신라인들이 왜 발해 건국 때 아무런 군사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통일이 깨졌다는 생각조차 가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발해를 두고서도 ‘삼한은 여전히 통일됐다’고 말했을까? ③ 문무왕이 당나라와의 통일 전쟁 때 왜 “당 태종이 (신라 무열왕에게) 평양 이남 백제 땅을 주기로 했다”며 고구려 최남단만 당나라에 요구했을까? ④ 사망 직전(673년) 김유신은 왜 신라와 당이 한반도 중부에서 한창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도 “삼한은 통일됐다”고 했을까? ⑤ 당 황제가 대동강 이남을 신라에게 준다고 했을 때 신라 성덕왕은 왜 감사하다고 했을까? ⑥ 삼한과 삼국이 같은 표현이라면, 신라인은 왜 삼한을 통일했다는 표현을 주로 쓰고, 삼국을 통일했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⑦ 신라인이 7세기 중엽 이후 중국 기록을 받아들여 ‘삼한=삼국’이라고 생각했다면, 신라인도 ‘삼한은 당나라 땅’이라는 중국이나 고구려 백제 유민의 입장을 받아들였는지, 또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중국에서 또 다른 동북공정론을 제기한다면 어떻게 우리 역사를 ‘방어’할 수 있는가? 한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해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말로 답을 대신하고 있다. 왜 태종 무열왕을 통일을 이룩한 왕으로 신라인들이 꼽았는지, 발해 건국 때 신라가 왜 모르쇠를 하면서 통일은 유지되고 있다고 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하는 형편이다. 하지만 ‘신라인들은 애초 삼한보다 약간 더 북쪽으로 확장된 지역을 통일하려 했고, 실제로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신라인들은 신라가 통일 전쟁 뒤 차지한 영역을 삼한의 지역적 범위로 생각했다’고 답하면, 위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애초 신라의 목적은 백제 지역(혹은 그보다 북쪽으로 약간 확장된 지역) 통일이었기에 통일을 이룬 왕은 백제 멸망(660년)을 목격한 태종 무열왕(661년 사망)이 될 수밖에 없다. 고구려는 신라가 통일한 지역이 아니었기에 그곳에 발해가 들어서든 발해를 무너뜨리고 요나라가 들어서든 신라인들은 상관이 없었다. 그곳은 신라가 통일한 땅이 아니었으니까! 그랬기에 신라인들은 ‘삼국 통일’이라는 표현보다 ‘삼한을 통일했다’는 표현을 압도적으로 많이 쓴 것이다. 비록 고구려의 옛 땅을 당나라가 잠깐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 세대 뒤 고구려 후예인 발해가 건국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북부는 다시금 우리 역사로 들어왔다. ‘삼한=삼국=당나라 영토’라는 중국 논리를 신라가 받아들인 적도 없지만, 발해 건국과 함께 이 논리는 설 자리를 잃는 것이다. 구체적인 수치로 입증한 ‘삼한 통일’의 근거 ‘신라인들이 삼국 통일을 이뤘다고 생각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모두 5개다. ‘삼한=삼국’으로 본 기록 2건과 ‘삼국 통일’이 표현된 3건이다.(통일 군주로 문무왕을 꼽은 ‘문무대왕릉비’나 『삼국사기』 문무왕 9년과 21년 기록 세 가지를 거론하면서, 이를 신라가 삼국 통일을 했다는 증거로 삼으려는 주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통일 군주로 문무왕을 삼은 것뿐이다. 문무왕은 당나라에 보낸 편지에서도 밝혔듯, 통일 전쟁에 임하는 신라의 목표는 고구려 땅이 아니라, 백제 땅 확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라인들은 삼국이 아니라, 대동강~원산만 이남을 뜻하는 삼한을 통일했다고 생각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45건이다. 삼한을 ‘통일 전쟁 이후 신라가 실제로 자치한 영역’으로 생각했음을 드러내는 기록이 18건, 통일 군주로 백제의 멸망만을 지켜본 태종 무열왕을 꼽은 기록이 7건, ‘삼한 통일’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기록이 11건, ‘고구려가 발해가 됐다’며 고구려 지역이 신라의 영토가 아님을 명확히 한 기록이 4건, ‘북국에 사신을 보냈다’며 발해를 국가적 실체로서 인정한 기록이 2건, 신라의 국경이 대동강~원산만 이남임을 밝힌 기록이 3건이다. 최종 스코어 45 대 5로, ‘신라인들은 삼국이 아니라, 자신들이 실제로 차지한 삼한을 통일했다고 생각했다’는 주장을 논증하는 증거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이럴 때 어느 주장에 손을 들어줘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전문가의 이야기라고 무조건 믿지 말고, 자기 눈으로 역사를 직접 검증하자 저자는 ‘신라인은 삼국 통일을 말하지 않았다’는 주장 검증에 ‘한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국민이 참여할 수 있다고 손을 내민다. 예전처럼 한자 자료를 해석해야 했을 때는 숙련된 소수 전문가만 ‘논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과 정보 공개 발달로, 신라와 관련한 모든 사료는 국문으로 번역돼 인터넷에 올라 있다. 삼국시대 사람들이 남긴 모든 기록과 번역문까지 말이다. 이제 검증은 전문가들만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술이 수도사 등 소수 지식인이 독점하던 지식 체계의 운용을 바꿨듯이, 인터넷 발달과 학술 정보 공개는 우리 역사 연구에서 대중의 접근을 비약적으로 확대시킨다. 한국사 교과서도 기술을 바꿔야 한다. 현재 교과서는 삼국을 통일했다는 의미로 ‘통일 신라’라는 표현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발해도 다룬다. 그래서 8세기 이후 역사를 ‘통일 신라와 발해’라고 부른다.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생각한다면 ‘통일 신라’에서의 ‘통일’은 삼국이 아니라, 대동강~원산만 이남을 의미하는 삼한을 의미하는 것이라야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주장하는 순간, 발해라는 존재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신라의 삼국 통일을 주장하려면, 발해 건국으로 삼국 통일이 깨졌다고 해야 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 발해는 양립 불가능한 존재다. 그렇다면 8세기 이후 우리 역사는 ‘삼한 통일 신라와 발해’ 혹은 ‘남북국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역사를 미화해온 콤플렉스, 이제는 과감하게 벗어나자 저자의 집필 동기로 두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는 어린 시절부터 가져온 의문, 즉 고구려 영토를 신라가 통합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자답하고 싶었다고 한다. 둘째는, 20년 가까이 문화재 기자를 하면서 느낀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저자 역시 기자 초년병 시절, ‘우리 문화유산의 찬란함’ 내지는 ‘우리의 빛나는 전통과학 기술’ 등의 표현을 많이 썼다고 한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자료에 접근하면 할수록 ‘한국사 중심으로 모든 역사가 돌아가는 듯한, 역사 인식의 천동설’에 혀를 차게 됐다.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자였다고 한국사학계는 주장하지만, 최전성기에도 중국 대륙의 ‘반쪽짜리 왕조’에 조공한 고구려가 어떻게 동북아시아의 패권일 수 있는가? 석굴암이 루트 2의 비례미라는 극도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건축됐다고 여러 연구서가 언급했지만, 막상 석굴암을 실측하니 그 어떤 ‘수학적 비례미’도 찾을 수 없었다. 조선 후기에 자생적 근대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국사학계는 입을 모으는데, 근대의 최선구로 볼 수밖에 없는 실학자 그 누구도 서구 근대 과학을 언급하며 우리 사고 체계에 통절한 반성을 촉구하지 않았다. 적어도 19세기 중엽 이전까지는. 저자는 근대화에 뒤늦어 외세 강점을 겪게 됐다는 열등감, 즉 ‘근대성 콤플렉스’ 때문에 외세 강점 이전의 역사에서 찬란함과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시도가 광복 이후 시작되거나 강화됐는데, 어느덧 그런 움직임이 ‘역사를 왜곡하는 미화’로 변질되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역사를 잊거나 비하해서는 안 되지만, 미화나 과장을 해서도 안 된다는 지적이다. 최근 논란인 ‘유사 역사학’ 논쟁도 연원을 따지면 한국사학계의 잘못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한국사학계 자체가 우리 역사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더 미화시킨’ 것이 유사 역사학이라는 입장이다. 우리 역사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읽자는 작은 시도로, 그리고 지난 40여년 이상 품어온 의문에 자답하면서 준비한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목차
자료 수집 방법을 공개하며 서론 신라인들은 삼국을 통일했다고 생각했을까? 1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자부했다’는 정설에 대한 다섯 가지 의문 첫째 의문: 신라인들이 통일을 이룩한 왕으로 태종 무열왕을 꼽은 까닭은? 둘째 의문: 신라인들이 ‘삼국 통일’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이유는? 셋째 의문: 신라인들에게 ‘삼한’은 어디였을까? 넷째 의문: 발해 건국에 신라가 모르쇠를 한 까닭은? 다섯째 의문: ‘삼한=삼국’이면 삼국 통일은 당나라가 했다? 2 우리는 삼국이 아니라 삼한을 통일했다! ‘신라인들의 기록’으로 본 신라인들의 통일과 국경에 대한 인식 ━━━━━ 문무대왕릉비 ━━━━━ 청주 운천동 사적비 ━━━━━ 성덕대왕 신종 ━━━━━ 이차돈 순교비 ━━━━━ 김입지가 비문을 지은 성주사비 ━━━━━ 대안사 적인선사탑비 ━━━━━ 황룡사 9층목탑 찰주본기 ━━━━━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월광사 원랑선사탑비 ━━━━━ 성주사 낭혜화상탑비 ━━━━━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진경대사탑비 ━━━━━ 예부에서 상서를 맡고 있는 배찬에게 올린 글 ━━━━━ 헌강왕이 당나라 강서에 사는 대부 직함을 가진 고상에게 보낸 글 ━━━━━ 당 황제가 조서 두 함을 내린 것에 감사를 표시한 정강왕의 표문 ━━━━━ 태사시중에게 올린 글 ━━━━━ 발해가 (당나라가 마련한 외교석상에서) 신라보다 상석에 앉지 못하도록 당 황제가 조치한 것에 대해 감사하며 올린 표문 ━━━━━ 당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신라로 보내주기를 당나라 조정에 부탁하는 글 3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한 검토 통일을 이룬 왕은 태종 무열왕! ━━━━━ 선덕여왕의 당 파병 요청 ━━━━━ 김춘추, 당에 백제 정벌을 요청하다 ━━━━━ 당, 국상 중이던 신라에 “고구려 정벌 참여” 명령 ━━━━━ 『삼국사기』 ‘김유신 전’에 나타나는 신라와 당의 관계 문무왕의 읍소 “백제 땅만 주세요!” 당의 영토가 된 고구려 ━━━━━ 발해의 건국과 삼한 ━━━━━ 신라, 당으로부터 대동강 이남의 땅을 공인받다 ━━━━━ 천헌성 묘지명 ━━━━━ 천남산 묘지명5 ━━━━━ 천비 묘지명 ━━━━━ 이은지 묘지명 ━━━━━ 고덕 묘지명 ━━━━━ 고진 묘지명 백제 유민들의 기록━━━━━ 『삼국사기』 ‘견훤 전’에서 보이는 신라 말기 삼한의 용례 ━━━━━ 『삼국유사』에 보이는 신라인들의 통일과 국경에 대한 인식 4 당 영토로 묘사된 한반도 한반도와 만주 상황에 대한 고구려 유민들의 기록 ━━━━━ 고요묘 묘지명 ━━━━━ 이타인 묘지명 ━━━━━ 천남생 묘지명 ━━━━━ 고현 묘지명 ━━━━━ 고모 묘지명 ━━━━━ 고질 묘지명 ━━━━━ 고자 묘지명 ━━━━━ 예군 묘지명 ━━━━━ 부여융 묘지명1 ━━━━━ 진법자 묘지명 ━━━━━ 흑치상지 묘지명 ━━━━━ 난원경 묘지명 중국인들의 관련 기록 결론 객관적이고 냉정한 한국사 읽기를 소망하며

저자
신형준
서울대학교에서 동양사학 전공, 서양사학 부전공. 고려대학교 고고학 전공(석사). 언론을 통한 사회 개혁을 꿈꾸며 1990년 CBS 입사. 3개월 만에 퇴사해 조선일보사 입사. 주로 문화재 담당기자를 했다. 2004년 한국사에 대한 지나친 미화를 비판한 『한국 고대사에 대한 반역』 출간. 2004년, 서울시 부시장 이춘식 씨에게 "서울광장에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도심에서 들어보자"고 권유. 그해 12월 24일, 자신의 아이디어가 '육화(肉化)'된 서울광장 스케이트장이 개장했을 때 특종 기사를 쓸 때보다 더 기뻐함. 이를 계기로 '글'이 아니라 '정책'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데 관심을 갖게 됨. 2008년 말 조선일보사 퇴사 뒤 대통령 비서실 연설기록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옮김. 조선일보사 퇴사 당시 역대 특종 건수 10위에 듦. 청와대에 들어가자마자 '아니다' 싶어 3주 만에 그만둠. 현재 선대의 고향인 인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독서와 집필 활동 중.

이 출판사의 관련상품
사랑과 상실의 뇌과학 | 이한음 | 학고재
오경환 OH, KYUNG HWAN | 학고재
평안도 이야기 | 김남일 | 학고재
도쿄 이야기 | 김남일 | 학고재
함경도 이야기 | 김남일 | 학고재

이 분야 신간 관련상품
가야로 가야지 | 김훤주 | 피플파워
안시성, 기록과 기억 | 김정배,조영광,이성제,정호섭,이준성 외 | 역사공간
 
도서를 구입하신 고객 여러분들의 서평입니다.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가능합니다만, 서평의 성격에 맞지 않는 글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

등록된 서평중 분야와 상관없이 매주 목요일 5편의 우수작을 선정하여, S-Money 3만원을 적립해드립니다.
0개의 서평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