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미학적 뿌리는 시각매체연구회(1985~ 1991. 시매연)이다. 시매연의 뿌리는 1979년 8월에 결성한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광자협)에 있으니 광자협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의 민중미술은 광자협과 오월미학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을 이어서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의3도 7·7농민항쟁 연작판화〉는 오월미학이 새롭게 영그는 21세기의 민중미학일수도 있으리라. 1980년대 현장에 섰던 민중미술은 그 시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제작되었으나, 이 연작판화는 380여년의 역사를 벼릿줄을 엮듯이 섬세하게 꿰어서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억투쟁의 미술이고, 공동체 신명의 미술이며, 민중미술을 역사화로까지 넓히는 작업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선배 홍성담은 1989년에 『오월 민중항쟁 판화집-새벽』을 묶었고, ‘현실과 발언’의 강요배는 첫 개인전으로 〈제주민중항쟁사〉(1992)를 열고 『동백꽃 지다-강요배의 4·3역사화』(1998)를 펴냈으며, 미술동인 두렁의 박홍규는 오랫동안 동학 연작을 새기고 그렸다. 전정호는 그들이 갔던 길을 걷는다. 과거를 이어서 새로 여는 그 걸음에 민중미술의 미래가 있을 것이다. 기억투쟁을 통한 기억에의 존속은 그 사회가 올바른 사회로 가기 위한 치유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폭력의 실체와 진실에 다가서기 위한 예술의 상징투쟁은 ‘칼에는 칼’이라는 대항 폭력을 초월하는 비폭력의 승화, 곧 인간 정신의 높은 미의식 활동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치유의 과정과 미의식 활동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배자와 권력자는 예술투쟁의 파장이 불러 올 변혁의 물결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또한 장대한 역사에 폭력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기억을 지배하려 들기 때문이다. 전정호의 연작판화는 기억의 지배에 저항하는 기억투쟁의 미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하의3도 7·7농민항쟁 연작판화〉를 말하기 전에 기억투쟁의 예술은 무엇이고, 그가 참여해 온 학내 미술운동과 사회 미술운동의 활동은 무엇이었는지 살핀 뒤에 농민항쟁 연작판화를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 김종길 / 미술평론가

●WORKS 봉건 권력과의 투쟁 일제 강점기 농지탈환투쟁 미군정과 농민항쟁 간척, 바다와의 투쟁 밥 눈물 ●TEXT 하의3도 농민항쟁사와 민중미학 삼백 삼식 삼년 뒤에 부르는 노래 프로필 Profile

#1. ‘기억투쟁’의 예술 현실의 모순이 옹이 진 곳에 뿌리내린 예술은 진달래만큼 애달프고 철쭉보다 독하다. 그 모순에 국가가 개입되어 있다면 필시 그것은 금기의 언어이자 금단의 영역일 것이다. 벼랑 끝에 뿌리 달고 선 꽃보다 대전차 저지 콘크리트 장애물 사이에 핀 진달래가 애달프고, 주검을 파먹고 자란 굵은 철쭉이 독한 것이다. 접신하여 공수가 터져 나오는 큰무당의 입처럼 하의3도에서, 제주4·3에서, 여수순천에서, 한국전쟁에서, 오월광주에서, 매향리에서, 새만금 해창갯벌에서, 동두천에서, 대추리에서, 용산에서, 아니 산하 곳곳에서 이름 없이 살육되고 버려지고 묻힌 그곳에서 군락을 이룬 철쭉의 붉은 입술은 그래서 독이 서려있지 아니한가!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Loomis Pound, 1885~1972는 예술가를 인류의 촉각이라 불렀다. 예술의 촉수를 날카롭게 세운 예술가의 시선은 총칼보다 강하고 깃털만큼 부드럽다. 그들의 촉수는 금기를 뚫고 금단을 해체한다. 국가가 그들을 가두고 억압할지라도 격통激痛의 언어로 쓴 예술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포문砲門과 같아서 금기의 벽을 깨부수는 신호탄이 되고야 만다. 촉각은 전염성이 강해서 더 많은 예술가를 낳고, 더 큰 예술을 잉태시킨다. 예술가는 하늘의 운명이 아니라 대지의 슬픔 안에 놓인 것이다. 예술가는 슬픔의 당사자로서, 샤먼으로서, 해체자로서 존재하기에 그의 내부에는 고통의 트라우마가 응어리져 있다. 그것은 본래적인 것이다. 예술은 이 본래적인 응어리의 표출이고 실체인 것이다. 그가 ‘예술가’로서 자신의 존재성을 상실했을 때 예술은 매너리즘에 빠지고 몰락한다. 영혼 없는 좀비들의 게걸스러움처럼 산 육신과 정신을 뜯어먹는 이빨이 될 뿐이다. 예술가를 좀비화하기 위해 폭력 국가의 수장이 예부터 수립한 예술정책의 표준은 금기를 무기화하고 금단을 법률화하는 것이었다. 폭력은 폭력이 행해지는 그 순간부터 각인된다. 몸에 각인된 폭력의 통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몸의 내부에서 피멍이 되어 떠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것은 육체와 영혼을 갉아 먹는 괴물이 된다. 다 파먹고 피멍 덩어리만 남게 될 때 결국 그는 죽음에 이를 것이다. 죽음 이후는 기억만이 떠돈다. 마지막 기억조차 상실되면 폭력은 다만 몇 줄 역사의 기록으로 남거나 완전한 망각 속으로 묻힐 것이다. 기억되지 않는 폭력은 아프지 않다. 그러나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은 한 사회가 완전히 붕괴되고 증발될 때만이 가능하다. 많은 예술이 기억의 흔적이고 기록이며 상징인 것은 죽음 이후까지 살아남아서 그 기억을 전승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예술 활동을 ‘기억 투쟁’이라거나 ‘상징 투쟁’으로 부르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전정호는 그가 태어나 자란 섬의 역사를 〈하의3도 7·7농민항쟁 연작판화〉로 새겼다. 실제 역사와 섬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새긴 판화는 씨알 민중들의 고난과 핍진의 형상을 드러내었고, 저항과 분노의 몸짓을 보듬었으며, 생명 살림의 공동체성이 뜨겁고 환하다. #2. 전정호의 소집단 미술운동과 미학적 경향성 광자협은 5년여의 활동을 끝내고 시각매체연구회(1985~1988)로 재편되면서 민중적 리얼리즘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창립취지문에서 “모든 문화는 민중의 삶을 기초로 민중의 해방을 목표로 해야 한다. 민중문화는 우리들의 구체적 현실에 입각하여 실현시키는 가치를 가질 때만 우리가 지향하는 민족민중운동의 지상과제인 민족통일로 가게 된다. 그와 함께 민중주체의 운동으로 질적 변환과 확산을 거듭하면서 문화매체에 대한 전투적 인식과 더불어 미술패의 강도 높은 기능을 요청하고 있다. 민족의 위기적 상황을 뚫고 해방통일의 세상으로 가는 길은 관제·신식민 문화에 의해서 초토화되어버린 우리들 가슴속에 전투적 정서를 회복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민중해방’과 ‘민족통일’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때의 경향성은 ‘민중’에 집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가 이론적 경향성과 진로를 새롭게 탐색하게 만든 사건이 터진다. 시매연에 참여한 전정호(당시 조선대 4학년)는 1987년 9월에 구속된 것이다.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 날이여〉가 문제가 되었다. 1987년 8월에 있었던 제2회 〈통일전-민중해방 민족통일 큰 그림 잔치〉에 출품하였던 이 걸개그림은 전국순회 전시 중 제주도에서 경찰에 의해 탈취당하고 이어 작가 구속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그림에는 진달래로 둘러싸인 백두산을 배경으로 중앙에는 성조기를 찢고 있는 노동자·농민의 분노한 모습과 좌측에는 이한열 열사 장례식 모습과 6·7월의 노동자 대투쟁 모습, 우측에는 한반도 곳곳에 설치된 핵무기와 수입 농산물에 의해 고통 받는 농민의 모습과 레이건의 품안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 형태로 전두환·노태우의 비열한 모습 등이 배열되어 있었다. 이들은 1988년 2월 집행유예로 석방되기는 하나 이 사건은 1980년대 미술운동사상 최초의 법정투쟁기록과 반항소이유서를 남겼고, 1987~1988년 미술운동의 진로에 관한 치열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광자협이 1983년에 시작한 시민미술학교는 미술민중화와 민중교육운동의 사례로 활용되면서 이후 공장과 농촌, 대학에서 민중교육 과정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조직의 선전, 홍보 요원을 배출하는 과정으로 발전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미술의 민중화, 미술의 대중화 이념을 수행하는 기관이자 미술운동의 성격을 민중주체 미술운동으로 이끌어 가는 실천의 중심이 되었다. ● 본문 중에서 (김종길 /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