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펴내며
욕구, 활동, 공간 그리고 행복
‘짓는 행위’는 인간의 역사나 다름없다. 동굴과 수혈주거에서 시작된 집짓기는 그리스, 로마의 신전과 공공건물, 중세 교회, 근대 주택과 사무실, 오늘날 초고층 빌딩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함께해 왔다. 성(사원, 교회)과 속(시장, 광장)의 구분, 권력과 위계(궁궐, 청사)의 상징, 휴식과 사랑(집, 호텔)의 장소, 여가와 놀이(쇼핑시설과 공원)의 무대 등 건축의 페르소나(persona)는 너무도 다양하지만, 짓는 행위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생존과 번식을 향한 인간의 욕구가 존재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구체적 공간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인간의 삶은 원천적으로 공간을 전제로 한다. 인간 행동의 원천은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려는 마음’이다. 어떤 것이 필요하다거나,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마음, 즉 욕구가 없다면 동기부여도 어렵고 행동도 하지 않게 된다. 공간은 활동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무대(setting)이다. 삶의 목적이 행복 추구에 있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BC322)는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는 활동을 통해 행복으로 다가설 수 있다고 보았다. 욕구에서 비롯된 활동이 공간에서 ‘바람직하게’ 펼쳐질 때 삶의 질이 높아지고 행복감도 커진다.
인간 생활의 90% 이상은 건조환경(built-environment)에서 이루어지며, 공원이나 숲 등 자연환경을 접하는 것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또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삶은 싫든 좋든 도시라는 건조환경에서 펼쳐진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하지만 방, 거실, 아파트, 사무실, 공원, 광장, 가로 등 다양한 도시환경이 감정, 생각, 행동, 웰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이해는 의외로 부족하다. 마음과 욕구를 반영하는 환경은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은 심리적 부담과 걱정을 키운다. 사용자의 마음은 외면하면서 기능과 효율, 비용과 경제만 쫓아가는 건축과 도시가 우리의 마음에 병을 심을 수도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마음을 담는 건축을 위하여
하나의 건축물도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로마시대 건축술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비트루비우스(Vitruvius Polio, c.BC90 ~c.BC20)가 「건축 십서(De architectura)」에서 아름다움(venustas), 견고함(firmitas) 그리고 편리함(utilitas)을 건축의 3대 요건으로 정리한 것만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또 건축의 입문단계에서 만나게 되는 학제성(interdisciplinarity), 종합성(multidisciplinarity) 개념 역시 건축이 지닌 넓은 스펙트럼을 함축한다.
ⅵ
이 책은 도시의 건조환경을 마음과 욕구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려는 기초적 시도이다. 독자에게는 심리학의 기초 이론과 개념을 건축과 도시에 접목하는 자그마한 노력으로 이해되기를 기대한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개괄적 내용으로, 심리학의 기원(1장)에서 출발하여, 이용자의 마음을 외면한 근대 건축(2장), 인간 욕구와 공간 환경(3장), 원시본능에 내재한 인간 욕구(4장) 그리고 건축에서의 소통문제(5장)를 설명한다. 2부는 용도별 건축을 다루고 있는데, 주거의 의미와 욕구(6장), 직장인의 사무실 심리와 업무환경(7장), 배우고 싶은 학습 공간(8장), 주의-회복 이론과 치유의 공간(9장), 기업의 공간 전략으로서 백화점(10장)을 포함한다. 3부는 재난과 도시 차원의 내용으로, 일상화하는 재난에 대응하는 건축(11장), 도시의 길 찾기와 광장의 심리(12장) 그리고 건강하고 안전한 도시를 만드는 방법(13장)을 다룬다. 책의 기획과 자료 준비, 그리고 초고 작성과 수정에 2년 이상의 시간을 보냈지만, 구성과 내용 면에서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여기저기 보인다. 나의 지식이 부족하고 학문적 사유가 깊지 못한 탓이다. 부족한 부분과 오？탈자는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며, 계속하여 수정？보완하고자 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3년 동안이나 우리를 심리적 공황상태로 몰고 갔다. 재난지역에서 서로 존중하고 돕는 공동체성이 꽃 핀다는 주장도 있지만, 코로나 19는, 적어도 오프라인에서는, 단절과 소외를 심화시켰다. 격리와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외로움’을 메꾸어 준 것은 디지털이었다. 이 책을 준비하는 동안 온라인 강의와 학생지도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도와준 건축학과 교수들과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팬데믹으로 국경 너머 친구들과의 소통이 더 빈번해진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샤헤드(Shahed A. Khan, 커틴대학교), 비쉬나(Bhishna Bajracharya, 본드대학교), 아와이스(Awais Piracha, 웨스턴시드니대학교), 스미타 (Smiat Mishra, 센트리온대학교), 에가린(Eggarin Anukulyudhathon, 카세샅대학교)은 라인(LINE)과 줌(ZOOM)으로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격려하며 어려운 시기를 함께 건너온 동료들이다. 그들의 관심과 격려는 원고 작성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건조환경의 심리학적 영향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1980년대 후반 석사과정 시절, 조대성 교수님의 강의에서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항상 이용자와 시민성, 다양성과 선택을 ‘좋은 설계’의 핵심 요건으로 강조하셨고, 이는 나의 공부에 있어서 언제나 중요한 관점이 되었다. 교수님의 가르침에 깊이 감사드린다. 나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인 누룰 아민(A.T.M. Nurul Amin)은 도시 공간과 장소가 지닌 사회？경제적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셨다. 늘 감사한 마음이다.
지식의 부족과 게으름에서 오는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작업을 마쳤다는 다소의 안도감도 있다. 이 조그만 성취감은 저자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초고를 꼼꼼히 읽고 아이디어와 조언을 준 아내와 그동안 힘이 된 가족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1장부터 4장까지 초고를 ‘비판적으로’ 읽고 메모해 준 딸 현교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베이비붐 세대 아버지와 밀레니얼 세대 딸이 바라보는 현상과 인식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지만, 이 세대 간 차이는 토론과 논쟁을 통해 종국에는 더 깊은 신뢰와 사랑으로 용해될 것으로 믿는다.
종이책이 인기가 없는 디지털 시대에 특별히 흥미롭지도 못한 주제의 원고를 선뜻 받아준 교우미디어에 감사드린다. 특히, 1년 이상 원고를 기다려준 남궁양 부장과 2개월 이상을 편집과 출간작업에 애써 준 이소정 과장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저자 권태호 |
, 0원
800P 적립(5%)
목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