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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위강국 백제의 길 : 백제를 다시 일으킨 무령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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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백제
저자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출판사/발행일 메디치미디어 / 2021.09.30
페이지 수 220 page
ISBN 9791157068890
상품코드 353816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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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내용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포했던 무령왕 2021년은 백제 무령왕이 양나라에 보내는 조서에 “고구려를 수차례 격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뜻의 ‘갱위강국’을 선포한 지 1,500년이 되는 해이자, 무령왕릉이 발굴된 지 50년이 되는 해다. 이런 시점에서 무령왕의 업적을 살펴보고 한반도 최대의 중흥 군주였던 그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웅진백제 초기는 혼란 그 자체였다. 무령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이전 세 명의 왕이 암살당하거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5세기 말에 즉위한 동성왕이 22년간 재위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고, 그를 이어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일으킨 왕이 바로 무령왕이다. 무령왕은 스스로 자국이 다시 강해지게 되었음을 선포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다. 그만큼 무령왕은 다시 강성해진 백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백제는 6세기 초반에 동아시아의 중심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무령왕 시기 백제는 군사적으로는 고구려를 수차례 격퇴하여 한강 유역의 일부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고, 국경 지역에 성과 목책을 쌓아 방어를 견고히 했다. 또한 남진정책을 통해 호남 지역의 일부와 섬진강 하구 유역을 확보했다. 무령왕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그간 닫혀있었던 외교의 활로를 열었다. 그 덕분에 백제는 중국과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 문물 교류를 활발히 할 수 있었다. 중국 남조 양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고, 이를 백제 고유의 것으로 재탄생시키는 백제화에 성공했다. 또한 이런 백제만의 문화를 왜와 가야, 신라에도 전파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과 일본, 한반도를 아우르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태동을 가져왔으며, 그 중심에 백제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잘 알려지지 않은 백제의 역사를 재조명하다 《갱위강국 백제의 길》은 백제의 역사, 그 중에서도 5~6세기 당시 한반도의 정세와 문화상을 무령왕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백제는 삼국시대 역사에서 중요한 한 줄기이지만,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많은 기록을 일본의 사료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혹자는 ‘잊힌 역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무령왕의 탁월한 업적을 중심으로 그간 잘못 알려지거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백제의 참모습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백제 역사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대표적인 사건도 무령왕릉의 발굴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1년, 우연한 계기로 발견된 무령왕릉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백제 문화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 발굴 과정이 후대에 오점으로 남기는 했지만, 무령왕릉의 발굴은 한국 고고학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요동치게 했던 대형 사건이었다. 무령왕릉에는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와 지석을 포함해 수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었다. 이 중에는 진묘수와 오수전처럼 중국 남조에서 들여온 것도 있었고, 무령왕과 왕비의 금제관식이나 귀걸이 등 백제 고유의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장식품들도 다수 출토되었다. 왕과 왕비의 관제는 일본에서 들여온 금송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가 압축적으로 들어 있는 무령왕릉을 통해 우리는 백제가 얼마나 세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또한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왜 등과 활발한 문물교류를 통해 백제를 동아시아의 중심국으로 발돋움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갱위강국 백제의 길》에서는 이렇게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백제의 문화, 그리고 그 문화적 성장을 주도했던 무령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는 아름다운 백제의 문화부터 설화와도 같은 무령왕 탄생의 비화와 무령왕의 수많은 눈부신 업적까지 모두 담아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서둘러 짐을 챙겨 웅진백제기 문화의 정수를 품고 있는 공주로 달려가 백제 유물과 유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갱위강국 백제의 길을 따라 무령왕을 만나고 싶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 시리즈 소개 〈공주가 좋다〉는 공주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춰 소개하기 위해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기획하고 엮어낸 역사문화 교양 시리즈이다. 1권 《역사의 보물창고 백제왕도 공주》에서는 1,500년의 잠에서 깨어난 고대 웅진백제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한편, 2권 《호서의 중심 충청감영 공주》에는 호서의 중심지이자 감영도시 공주에 새겨진 300여 년 조선의 역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역사와 더불어 근대 공주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간다. 이번에 출간된 3권 《갱위강국 백제의 길》에는 웅진백제기 최고의 성군이자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든 중흥 군주 무령왕의 일대기를 담아냈다.
목차
책을 펴내며 1장 한강 수복의 꿈을 찾아서 백제와 고구려, 한강 유역 공방전 웅진에서 와신상담하다 불안정한 왕권과 정치적 혼란 무령왕, 왕위에 오르다 *역사 이야기 보따리: 백제의 6좌평 제도 2장 무령왕의 남진정책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백제의 세력 신라·가야와 활발하게 교류하다 백제와 신라의 동맹과 파국 *역사 이야기 보따리: 가야, 왜 삼국인가 3장 바다 건너 서쪽에서 온 문화들 웅진백제, 양나라와 긴밀하게 교류하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백제화의 상징, 무령왕릉 중국의 최고급 문화를 동시대에 받아들이다 *역사 이야기 보따리: 삼국시대의 조공과 책봉 *역사 이야기 보따리: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4장 왜와 백제의 강고한 협력 백제의 왕과 왜의 관계 무령왕릉에서 살펴본 백제와 왜의 관계 바다를 건너간 백제 왕족과 백제 사람들 *역사 이야기 보따리: 《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 5장 웅진백제의 화려한 부흥 만방에 ‘갱위강국’을 알리다 무령왕 시대의 안정적인 내치 진정한 중흥 군주가 되다 *역사 이야기 보따리: 백제 왕실의 결혼 *무령왕 로드 체험하기 *백제 역사 연표 *참고 자료
본문중에서
“고구려를 수차례 무찔렀으니 우리가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들었구나!” 무령왕은 모든 대신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계속되는 고구려의 공격과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말갈의 침략을 모두 물리친 무령왕이 ‘백제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선언한 것이다.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지 30여 년 만에 빠르게 국력을 회복해 중흥기를 맞았고, 그 중심에 무령왕이 있었다. 무령왕은 정치적으로 안정을 꾀하고 백성을 널리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군사·외교적으로도 더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 백제를 다시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_17~18쪽, 〈백제와 고구려, 한강 유역 공방전〉 중에서 왕으로 즉위할 당시에 무령왕은 원숙한 40세였다. 그는 신장이 8척으로 키가 매우 크고 용안이 그림처럼 수려했으며, 인자하고 관후해 민심이 따랐다고 한다. 민심이 따랐다는 것은 그를 지지하는 일정한 집단이 형성돼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무령왕은 왕위에 올라 가장 먼저 동성왕을 시해한 백가에게 엄벌을 내렸다. 이제 겨우 기틀이 잡힌 왕권을 다시 흔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숨이 위태롭게 된 백가는 가림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무령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까지 나아가서 백가를 토벌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백가는 항복했고, 무령왕은 그를 단호하게 단죄했다. 이 과정을 통해 무령왕은 왕위 계승에 정통성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자칫 흔들릴 수 있었던 왕권을 다시 확립했다. 또한, 반란군을 평정함으로써 나라의 군사권도 장악했다. 백제의 중흥 군주로서의 출발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_48~49쪽, 〈무령왕, 왕위에 오르다〉 중에서 고구려의 공격은 계속됐지만, 무령왕의 치세로 사기가 높아진 백제군은 연전연승을 거뒀다.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한성을 공격하자 무령왕은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격퇴했고, 512년(무령왕 12)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공격하자 친히 정예병 3,000명을 거느리고 가서 대파했다. 523년(무령왕 23)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에게 쌍현성을 쌓게 해 북쪽에 대한 방어를 철저히 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무령왕은 대내적인 결속을 이뤘고 대외적으로 백제의 위상을 과시할 수 있었다. 또한 예전에 잃었던 한강 유역의 땅을 일부 되찾으면서 고구려에 대한 수세적인 상태를 대등한 관계로 격상시켰다는 데도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_50쪽, 〈무령왕, 왕위에 오르다〉 중에서 무령왕은 적극적인 북진정책으로 주요 접전지를 한강 이북 지역으로 확대했다. 이제까지 수세적이었던 고구려와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무령왕은 고구려와 대등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이를 뒷받침할 인적·물적 자원의 필요성을 인지했던 매우 현명한 군주였다. 무령왕은 재임 기간에 과거 백제의 백성이었다가 가야 지역으로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 호적에 편입시키고(509년, 무령왕 9) 국가적으로 제방 시설을 확충했다(510년, 무령왕 10)고 사서에 기록돼 있다. 또한, 무령왕은 남쪽 영토 확장에도 힘썼다. _59쪽,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백제의 세력〉 중에서 웅진 천도 이후 백제와 가야제국 사이 교류의 흔적은 주로 가야 지역에 분포하는 백제 유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 무령왕 대를 전후한 6세기 이후 가야의 문물에서 백제, 신라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백제계의 문물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백제의 문화가 인접국인 가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지만, 가야제국이 국가적인 면모를 갖추며 성장하는 데 백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배경도 있었다. 가야 입장에서 강성한 백제 문화는 선진적인 본보기였을 것이다. 특히 가야는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소유하거나 무덤에 부장하는 위세품에서 백제계 문물을 적극적으로 모방하고 수용했다. _68쪽, 〈신라·가야와 활발하게 교류하다〉 중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바로 〈양직공도〉에 나타난 백제의 위상이다. 중국 난징박물원에 소장돼 있는 〈양직공도〉의 모사본 〈당엽립본왕회도〉를 살펴보면, 백제의 사신은 양무제의 행렬 뒤로 아프가니스탄(호밀단)의 사신과 페르시아(파사국)의 사신에 이어 세 번째에 있다. 당시는 실크로드가 국제 교역의 중심 통로였다. 양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해 이 두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런데 백제 사신이 세 번째로 서 있다는 점은 당시 백제가 이들 못지않게 국제적 위상이 대단히 높았고, 동아시아 국제 교역을 다시금 주도할 정도로 6세기 양나라와 교역이 활발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_103쪽, 〈웅진백제, 양나라와 긴밀하게 교류하다〉 중에서 무령왕릉의 지석은 문화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 가치 또한 높은 유물이다. 무령왕의 지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 임진날에 붕어하여 을사년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여기서 사마왕의 ‘사마’는 무령왕의 어릴 때 이름이고 ‘무령왕’은 그의 사후에 올린 시호다. 이외에도 이 지석을 통해 여러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왕이 승하한 해와 나이가 지석에 기록됨에 따라 왕의 생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이로써 무령왕은 백제의 왕 중에 유일하게 태어난 때와 사망한 때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왕이 됐다. _115~116쪽,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백제화의 상징, 무령왕릉〉 중에서 무령왕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에서 다르게 서술되어 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백제신찬》에서 언급된 내용을 토대로 무령왕이 곤지의 아들이라는 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무령왕은 왕위에 올라서 백제의 중흥기를 이끌었고, 무령왕 이후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까지 모두 무령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 면에서 보면 무령왕은 그의 혈통을 떠나서 백제 왕실의 ‘중시조’라고 해도 될 정도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_142쪽, 〈백제의 왕과 왜의 관계〉 중에서 무령왕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그치지 않고 빼앗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한수 이북에 쌍현성을 세우고” 병사를 두어 지키기까지 했다. 또한 남쪽으로는 가야 지역에 적극적인 공략을 추진했다. 그러니 ‘갱위강국’, 즉 다시 강국이 됐다는 선언을 자신 있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양무제는 무령왕에게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指節 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이라는 작호를 내려 그의 지위를 인정해줬다. ‘영동대장군’이란 작호는 당시 양나라의 주변국 중에서 가장 높은 대접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고구려와 신라 역시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조공했지만, 백제처럼 ‘영동대장군’이란 책명을 받지는 못했고 그보다 하나 아래의 작호를 받았다. _182쪽, 〈만방에 ‘갱위강국’을 알리다〉 중에서 웅진 천도 이후 무령왕 이전까지는 왕권이 매우 쇠약한 상태여서 왕조차 왕위에 오른 뒤에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했다. 귀족들의 세력 다툼도 잦았고, 심지어 해구 같은 귀족 세력의 반란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그런 불안정한 정국을 해소하기 위해 무령왕이 찾은 방법은 왕족을 이용한 왕권 강화였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백제는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돋움했고, 그렇게 하나로 모은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었다. 왕실과 중앙 조직이 정치적으로 안정됨으로써 무령왕은 내치에 더욱 내실을 다졌다. 그뿐만 아니라, 무령왕 본인도 이전의 수많은 백제 왕과 다르게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_191쪽, 〈무령왕 시대의 안정적인 내치〉 중에서 무령왕은 재위 기간에 중국 남조 양나라에 두 번이나 사신을 보냈다. 또한, 왜국에도 두 차례 사절을 파견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다. 백제가 하나의 왕국으로서 이웃 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나라 간에 공식적인 수교를 맺고 정상회담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웅진백제 초기에 혼란을 겪으면서 외교에 신경 쓸 수 없었으나, 이 시기를 완전히 극복하고 외국과 교류에 힘썼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봤을 때, 적어도 6세기 초에는 백제를 중심으로 중국 남조와 가야, 왜까지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서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교역의 중심은 백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백제의 동아시아 문화권 형성은 무령왕 최대 업적으로 손꼽을 만하다. _201~202쪽, 〈진정한 중흥 군주가 되다〉 중에서

저자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근대도시 공주의 탄생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 메디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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